일과 육아 덕분에

by ordinary kim

출장이 유난히도 많던 시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아이와 남편의 저녁시간을 상상했다. 아이는 아빠가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고, 샤워를 하고, 매일 그렇듯 동화책을 읽고 잠자리에 누웠을 것이다. 잘 때쯤엔 나를 잠깐 찾았겠지만, 얼른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엄마를 만날 거라고 잘 설명했을 것이다. 남편과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돈을 버는 일은 원래 고된 것이고, 나의 소득으로 나와 남편, 아이가 살아가는 것도 이미 감사이고 축복이다. 하지만 이 생각에 다다라서는 나 자신이 거북해졌다. 돈을 버는 일을 중심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돈을 벌지 않는 사람들이 가정 내 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과 육아 병행에서 이런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조차 어디에서도 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꿋꿋하게 견뎌나가고 있기 때문이고, 직장에서 그저 배려해야 할 점이 많은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씁쓸함을 감추고자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 저녁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점심도 종종 건너뛰었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지만 학생 신분인 배우자에게 당연하게 내가 직장으로 생기는 공백을 요구했고, 아이 돌봄 시설이나 선생님들께 부모 역할의 일부까지도 이전했다. 일과 육아에서 무엇을 후순위로 두는 것인지는 생각할 겨를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에는 ‘내가 돈을 버니까’ ‘네가 애를 키워’라는 일과 육아를 정확히 분리해서 부부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렇게 ‘수월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과 육아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부담감을 줄였다. 돈을 버는 이는 아버지, 아이를 키우는 역할을 어머니가 주로 맡아왔다. 하지만 요즘은 고정적 역할의 성별이 바뀌기도 한다. 실제로 더 이상 ‘고정된’ 성 역할을 여성, 남성 모두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2024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결혼·임신·양육 인식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출산할 의향이 있는 여성 응답자의 88.8%는 출산 이후에도 경제활동 지속을 희망한다. 또한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KB지식 비타민,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분투하는 30대 요즘아빠'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남성들의 일과 가정생활 우선순위 조사 결과, ‘일 우선시’ 응답은 2013년 64%에서 2023년 40%로 크게 줄었고, ‘가정 우선시’ 응답은 8%에서 17%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고정된 성역할의 성별이 바뀌거나 가정의 역할을 외주화 하는 차원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성별에서만 자유로워졌을 뿐, 부부 중 경제활동을 ‘더 많이’ 혹은 ‘더 오래’ 하거나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사람이 ‘돈을 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애를 키운다’. 또는 모든 양육자가 경제활동을 하고 ‘양육’은 특정한 ‘노동’으로 분류하며 ‘외주’를 선택한다. 조손육아도 매우 늘어나고 있는데, 2022년 한국리서치 '2022 황혼육아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서울·경기·인천에 사는 만 55세 이상 '황혼육아 조부모' 302명 중 응답자의 72%는 손주 육아에 대해 "비자발적으로 참여했다"라고 답했다. 정책적으로는 돌봄 공백이 없도록 (또는 경제활동의 공백이 없도록) 어린이집 보육 이용 시간을 365일 최대 밤 12시까지로 확대하고, 0세 반을 확장하는 건 물론, 24시간 어린이집을 확대 지정하는 추세다.


얼핏 보면 우리 사회에 성별에 무관하게 원한다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면에는 ‘일과 육아 병행’라는 삶의 가장 큰 보람을 줄 수 있는 두 가지 주제를 가장 빠르고, 저렴한 대안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러한 대안에 대한 공감대는 씁쓸하게도 각 가정을 넘어 직장, 사회까지 동기화되어 있다.


‘출산의 경제학 : 새로운 시대(This Economics of Fertility : A New Era)’ 논문을 쓴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경제학과 교수 마티아스 도프케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가족친화적 사회규범’이라고 말한다. 육아휴직을 비롯한 다양한 가족 정책과 유연한 노동 시장과 더불어, 가정과 돌봄에 의미에 대해 사회에서 정서적인 공감대 만들어져서 여러 규범이 가족친화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육아 병행에 있어 그저 부담을 지는 사람을 바꿔보는 단순한 측면을 벗어나 공감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사결정의 기준을 가질 수 있을까.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착한 큰 언니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늦은 시간 퇴근해서 아이들의 자는 모습만 보았다는 고리타분한 그 옛날이야기를 이제는 탈피해 볼 수 있을까. 가족이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누리는 추억과 관계와 지지, 돌봄 과정에서 더욱 깨닫게 되는 가정의 의미와 그 안에서 각 구성원들의 성장을 상상하게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일과 육아 병행의 부담감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일과 육아 덕분에 더욱 보람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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