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엄마의 사생활> 중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임윤찬 군의 말이다. 음악을 하면서 너무 예민해진 자신의 성격을 설명하는 말인데
나는 그의 이야기를 종종 다른 곳에서 떠올린다. 더 없는 풍요를 누리는 지금 세대의 아이들이지만 미래의 풍요를 보장받지 못한 아이들. 그들이 아이를 키울 때 혹 이런 마음이 들면 어쩌지?
그 질문은 서귀포에서 떠올랐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서귀포에 사는 친구와 아이동반으로 만난 날이었다. 비록 제주시에 살지만, 학기 중에는 여느 곳과 다름 없는 일상을 살다 보니 서귀포에 갈 일이 별로 없기에 오랜만에 휴양지에 간 느낌이었다. 만남장소로 친구가 안내해준 곳은 수영장 카페였다. 음료값을 내면 너른 수영장에서 시간제한 없이 수영할 수 있는 처음 가본 곳이었다. 카페에 딸린 수영장치고는 수영장의 크기가 꽤 컸는데 그 옆에 더 어린아이를 위한 얕은 풀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카페의 주인공은 수영장이 아니었다. 바로, 멋진 풍경이었다. 굵직굵직하게 자란 야자수와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범섬. 서귀포의 선셋 라운지라는 닉네임이 괜히 붙은 곳이 아니었다. 수영을 하다 지는 해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림 같은 풍경이 그곳에서는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카페에는 내 아이처럼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았다. 어쩌다 한 번 제주 여행중에 그런 경험을 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음료값이 다른 카페와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비싼 편은 아니었기에 무더운 여름, 부모는 풍경을 즐기고 아이는 수영장에서 실컷 놀며 부모와 아이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와있는 나는 '아, 참 좋다'가 아닌, '아,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왜일까?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아이들이 그 풍요 속 부모의 노고에 관한 고마움을 잘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차려는 것인가? 또는 아이들에게 보장되지 못한 풍요에 깊은 연민을 느끼는 것인가?
아이가 어릴 적 마트에서의 일이다. 트렁크에서 유모차를 내려 아이를 태우는 나를 보고, 곁을 지나던 한 무리의 중년 여성이 말했다. "우리 때는 차가 뭐야, 저런 유모차도 없었어". 때아닌 자신의 라떼 시절 이야기에 불쾌했었다. 그때 느낀 불쾌감은 여전히 선명한데, 지금 수영장 카페의 음료수를 벌컥 이던 나는 왜 씁쓸해졌던 것일까?
아닌 척하지만 실은 맞다. 나는 어느새 상대방의 서사를 이해하기보다 나의 뚝심으로 라떼 시절을 절로 떠올리는 꼰대가 되어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회피했는지도 모른다. MZ세대를 알아보는 일을. 신문과 방송, 그리고 소설에서 그려지는 MZ세대의 성향 중 극히 일부만 알고 소화하며, 마치 나는 MZ세대는 아니지만, 그들이 싫어하는 꼰대도 아니라는 듯 입을 다물고만 살았다.
그런데 이번 호 민들레 잡지는 'MZ세대를 말한다'는 책 한 권을 MZ세대에 관해 담았고, 민들레 정기 구독자인 나는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역시 정기구독의 힘이다! 도서관에서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주제의 책이 집으로 배달되었기에 이제는 그만 회피하고 표지를 넘겨 새로운 세상을 펼쳐보게 하는.
MZ세대에 관해 알게된 새로운 사실은 바로 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대론이라는 점이었다. 전 세계 중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이 신선했다. 아니 뭐라고? 정말 외국에서는 이런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 인간인데, 지극히 편협했던 나의 세계를 인지하게 된다.
게다가 책에 소개된 MZ세대의 구분법이 꽤 실용적이기도 했다. 전화하는 동작을 손으로 취할 때, 이전 세대들은 엄지손과 새끼손으로 수화기를 만든다면, MZ세대는 손가락과 손바닥 전체를 활짝 펴서 스마트 폰을 만든다는 말에 실소했지만, 냉큼 접수했다.
MZ세대는 워라벨을 지극히 중시한다고 하는데 나 역시도 그 부분은 매우 공감하기에 그렇지! 그래야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젊은 시절 열정페이로 맘껏 일해본 후에 내린 결론이라면, MZ세대는 달랐다. MZ세대가 직장 상사에게 '퇴근 후엔 절대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이유를 '라이프' 쪽이 아니라 '워크' 쪽에서 바라보자고 책은 말한다. 워라밸에 대한 MZ세대의 적극적인 호응은 최대한 일을 적게 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하는 시간이 지금 보다 더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는 절실한 호소라고. 사실 누구보다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지만, 그 의미는 선배 세대가 느끼고 있는 의미와 다른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들의 목소리는 체념이 섞인 자기 이해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고.
그러니 그들을 그저 버릇없고 개념 없는 세대라고 생각해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 역시도 한 때는 일이 전부였고, 일을 통해 사회 구성에 참여하고 있는 기분에 도취되었던 시절이 아직 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리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사라졌을 때의 황망함과 공허함을 여전히 진하게 맛보는 중이기에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미안함이 두터워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MZ세대는 젊다고 해서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만 소비되고 있는 MZ 세대론은 대부분 소비와 관련이 있는데, 공유 플랫폼을 이용하거나 중고 제품을 소비하고, 경험 위주의 소비를 하며, 사회적 가치에 부응하는 스토리가 있는 상품을 좋아하고, 개념 소비한다고 정의한다고 책은 말해주었다. 그러니 MZ세대가 되려면 이런 식의 소비를 더 자주 하고, 이런 데 돈을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마케팅에서 활용되고 있는 MZ세대라는 용어를 정확히 인지하게 해준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인데 MZ세대를 다시 바라보게 된 지금 나는 무엇을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하면 좋을까. 더구나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라서 아이와 함께하는 내 삶의 지향점을 어느 곳에 두면 좋을지 책을 읽으며 곱씹어 보게 된다.
다시 서귀포의 그 카페로 돌아가 내가 불편감을 느낀 지점을 살펴본다. 어쩌면 그 감정도 소비와 연관 있지 않을까. 카페에서 보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소비문화가 그저 부럽기 보다는 솔직한 내면으로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불편감이 엉뚱한 대상에게로 향했다. 나에게는 열심히 달려서 마흔이 넘은 후에야 겨우 갖게 된 풍요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일상적으로 누리는 아이들에게 괜히 그 화살을 날렸다. 꼰대 아닌 꼰대가 되어 라떼 시절을 들먹인 저변에는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노력을 애도하고 싶던 마음을 숨겨둔 채로.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
마치 꼰대가 아닌 척, 입을 꼭 다물고만 있을 게 아니라 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MZ세대의 성향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스며있는 거라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그들을 좀 더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더욱 아이들과 반려자와 사회 구성원과의 대화를 통해 경력 단절 후 엄마로만 지내온 시간의 응어리가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도록 스스로 다독이고 이해하며 결국 타인도 보듬을 수 있도록 작은 대화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책 속의 글 중 <10대 꼰대가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그동안 후배들과 거리를 두며 나의 꼰대역을 숨겨왔지만, 아마 후배들은 분명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은 숨겨진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이제는 그래도 '소통하는 꼰대'가 되고 싶다. 시작도 하기 전에 선부터 긋는 사람이 아니라, 꼰대 소리 좀 듣더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말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봐야겠다. 적어도 다음번 민들레가 배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