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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기적 Jan 04. 2021

흙손

이미 어른이지만 진짜 성인으로 익어가던 마흔 번째 봄과 여름

아이들을 향한 짜증이 도를 넘어서는 지점에 도달했다.

딱히 그럴 일도 아닌데, 그러지 말아야지, 부드럽게 이야기해야지 다짐해보지만

계속 도루묵이다.

이제는 정말 그만!

마음속으로 외친 후 몸을 일으켜 며칠째 미뤄두었던 아침 운동을 다시 한다. 보살펴 주지 못해 말라가던 화분의 분갈이와 겨우내 방치되었던 테라스 청소를 시작한다.

     

요즘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얼마나 더 부지런해져야 하는 걸까?

집에서 한숨도 안 쉬고 움직이는데,

왜 여전히 싱크대에는 설 거짓 거리가 쌓여 있을까?


엄마는 놀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이를 안고 잠시 뒹굴기는커녕, 잠들기 전 겨우 책 한 권도 못 읽어주는 날이면 마치 직무를 유기하는 것 같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힘차게 뛰지 못한 채 여전히 종종거리는 모습으로.

     

왜?라고 묻는 일을 그만두고 몸을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그간 노란 화분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이름 모를 식물을 말끔히 치운 후, 작은 화분 속 로즈메리를 옮겨 심는다.


"양심도 없네!"


잠시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그 손을 코에 갖다 대며 잔뜩 기대를 품는 모습이라니... 그런데도 그간 보살핌의 양과는 관계없는 로즈메리의 청량한 향이 맡아지자 조금 안도감이 든다.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머무른다. 가위로 로즈메리 잎을 잘라 부엌에 가져다 둔다. 정수한 물에 로즈메리와 채소를 담가 마시려 했던 계획은 이제 더는 계획이 아니다.  

   

남편이 늘 해오던 재활용 쓰레기마저 말끔히 정리한 후 까칠해진 손을 바라본다.

장갑을 끼고 하면 좋았을 텐데, 일을 거의 마친 후에야 장갑 생각이 났다. 남아있는 테라스 정리를 모두 마치자 오후 3시. 다진 마늘 가득 넣은 김치 수제비와 샐러드로 조용히 혼자만의 첫 끼를 먹는다. 아이들이 아닌 지극히 나만의 취향으로 차린 식사는 소박했지만 충분했다. 그러다 문득 라디오에서 조시 그로반의 You are still you라는 음악이 흐르자 눈가가 촉촉해진다.


You are still you. by Josh Groban

(음악이 궁금하시다면 클릭!)


작은 일에 불같이 짜증 내고 화를 내는 모습도 나이고, 금세 사과하고 만회하려는 모습도 나이다. 그런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을 때도 있지만,

꽤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도 내 모습이다.

그저 다 나일뿐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향을 품고 있던 로즈메리처럼,

그 모든 노력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말해주는 노래가,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딩동.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오늘따라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나를 위해 점심 무렵 조용히 아이들과 집을 나서 주던 남편이 남겨준 화단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 하늘은 저렇게 파랬구나….'

새삼 사진 속 하늘색에 감탄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고 테라스를 정돈하는 동안 손은 비록 흙 범벅이 되었지만, 그 흙손은 나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었다. 보살핌 밖에 있어도 향기를 품는 로즈메리처럼, 내 모습에 실망하고 속상했어도 내일은 또 다를 거라며 곧잘 희망을 품는 나의 모습으로....


‘손을 움직이면 잡념이 사라진다.

 마음은 가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손에도 있다.’


언젠가 책에서 본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의 흙손이 오늘 나에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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