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단단하게, 생활 밀착형 페미니즘
가랑비가 내리던 날 아침, 남편은 큰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교통봉사를 나갔다.
“어땠어?” 라는 물음에
“교장 선생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눠서 좋았어.” 하며 싱글벙글한 남편.
‘앗싸! 이번에도 성공이구먼.’
외주를 준다. 줄 수 있는 건 모조리 준다. 준 적 없는 것도 일단 한번은 믿고 남편에게 몰아준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대면으로 진행된 초등학교 일학년 담임선생님과의 학부모 상담까지 아낌없이 주었다.
그렇게 그간 전담했던 전업맘의 업무를 하나씩 육아 동료 남편에게 인수인계한다. 아이 낳기 전 십여 년의 직장생활 경험상, 자고로 업무분장이 완료된 후에는 되돌리기 어려운 법! 외주업무 리스트에 이제 교통지도도 매끄럽게 추가되었다.
며칠 후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운동장에 나와 계신 교장 선생님께서 먼저 반가운 인사를 건네신다.
“어머! 얼마 전 솔방울(가명) 아버님께서 교통지도를 나오셨더라고요. 너무 바람직합니다.”
얼핏 시어머니와 같은 연배로 보이는 여자 교장 선생님. 결혼과 함께 현직 교사를 은퇴한 시어머니께 그 시절은 출산휴가가 한 달이었는데 그나마도 공무원이라 가능했다고 들었다. 종종 육아 경험을 나눠주던 교장 선생님도 평생 직장맘으로 사셨을 텐데... 교장 선생님과 말없이 주고받는 눈빛에서 육아 경험자 여성으로서의 동지애가 움튼다.
이렇게 일 년에 겨우 한번이지만 생색 제대로 낼 수 있는 일을 골라 남편에게 외주를 준다. 굳이 아껴둘 이유가 전혀 없다. 아 물론!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다 해도 가정이 파탄 나는 수준의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도 딱히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아빠 손을 잡고 집을 나서도 그다지 큰일은 안 일어난다. 아니, 그럴 거라고 눈 딱 감고 믿어 버린다!
눈 한번 감았을 뿐인데 나의 삶은 좀 더 가뿐해지고 그의 삶은 좀 더 즐거워진다. 딱 한 번 교통지도를 다녀온 후, 오가는 길에 이웃들로부터 주고받는 인사로 그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곁에서 함께 걷는 나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자리한다. 우쭈쭈의 신통함이란 실로 어마해서 내 몸집 두 배인 사십 대 중년 남성에게도 안 통할 수가 없다. 아니 그 나이에 어디서 그렇게 칭찬이 가득 담긴 인사를 주변으로부터 받겠는가?
역시나 좋은 예감은 적중했다.
“여보, 오늘 솔방울 하교는 내가 맡을게!”
“우쭈쭈야! 아니, 남편 고마워! 참 좋은 일이네.”
그렇다고 이 남자가 백수는 아니니 결코 오해 마시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연차 휴가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길! 자고로 연차는 휴가 갈 때나 아플 때만 쓰는 것이 아니다. 가족 모두의 심적 건강을 위한 일에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아니 써야 하고!) 휴가 갈 때 쓸 연차를 아끼기 위해 하루 치 연차를 반으로 나눠 교통지도와 학부모 상담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어차피 교통지도와 학부모 상담은 한 학기에 한 번뿐이니 전혀 무리 없는 매우 현명하고도 야무진 연차 사용법이라 자부한다.
그것이 왜 현명하냐고 물으신다면 원 플러스 원은 마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아 일상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하루 연차(혹은 반차)를 사용해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동안 나에게는 느긋한 자유시간이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육아 참여에 대한 아빠 본인의 뿌듯함과 주변의 칭찬은 나비 효과를 만들어 나의 주 업무인 아이 하교 픽업을 쉬게하니 말이다. 그렇게 육아 일상 속 원 플러스 원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파악하고 나자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그간 전담하던 나의 육아 업무를 하나하나 남편과 나누는 중이다.
아 물론 책에서 읽긴 했다. 남편과 내가 함께 아이를 낳겠다고 선택한 거니까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은 우리 둘에게 똑같이 있다는 것을. 만약에 내가 싱글맘이라면, 상황에 의해서든 선택에 의해서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정말로 독신이 아닌 이상 혼자 아이를 키워서는 안 된다고.('엄마는 페미니스트', 차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민음사, 25p) 지당한 말씀이다. 또한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 남편은 어떤 특별한 감사나 칭찬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부분을 마저 읽었을 때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기립박수를 치고 싶었다.
내가 실천하고픈 페미니즘도 바로 그것이다. 남편이 교통지도 도우미를 하던, 하교 픽업을 하던 굳이 칭찬이 필요 없는 일상에서 사는 것. 마치 아이가 여덟 살이 되면 학교에 입학하고 열세 살이 되면 졸업하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일상에서 내 아이들이 자라는 것. 그 바람이 일상이 되기 위기 책에서 읽고 깨달은 것을 부지런히 실천한다.
한 시절 젊은이들은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 그 전 세대로부터 남녀가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발전된 관계를 갖는 것을 직접 보고 배우며 자라지 못했으니 책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연애 세포를 자가 생산했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세대는 적어도 연애를 책으로만 배우지 않는다. 그 일처럼 지금 나는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배우는 중이다. 연애를 책으로 배운 세대들은 의문조차 품지 못했던 사안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이고, 왜 때문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나다. 그때 페미니즘 책을 펼쳐 읽고, 종종 기립박수도 쳐가면서 좀 더 명료한 시선을 부지런히 얻는 중이다. 물론 육아 동료인 남편도 자랄 때 배우지 못한 페미니즘을 일상에 적용하며 하나씩 함께 배우고 있다.
그 배움의 결과로 지금의 아이들이 적어도 페미니즘을 책으로만 배우지 않도록,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는 말을 우스개 소재로 사용되듯, 언젠가는 페미니즘도 그럴 수 있도록, 책으로 배운 페미니즘을 더욱 부지런히 실천할 생각이다.
어느덧 오후 2시, 큰아이 픽업을 위해 남편의 승용차가 막 교문을 들어설 시각이다. 역시나 운동장 저편에 서서 전교생의 하교를 지켜보고 계실 교장 선생님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 오늘은 아버님이 하교를 오셨군요.
너무 바람직합니다!”
< 부드럽게, 꾸준하게, 오늘의 배움도서 >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 다섯 가지 방법,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