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솔트레이트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브래드 버리 이야기
어부지리: 어부의 이익의 줄임말로 쌍방이 다투는 사이, 제삼자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이익을 취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브래드 버리는 아무도, 심지어 본인조차 메달을 기대하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완주'만을 목표로 참가한 2002년 솔트레이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기적적인 세 번의 어부지리 덕택에요. 그의 행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고, 브래드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호주 사전에 "Do a Bradbury(예기치 못한 행운)"라는 말이 정식으로 등재되었고요. 그럼 지금부터 브래드 버리가 2002년 쇼트트랙 남자 1000m 경기에서 어떻게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상위 2명이 준결승에 진출하는 준준결승전. 브래드는 우승 후보였던 미국의 안톤 오노, 캐나다의 가뇽 그리고 일본 선수와 한 조가 되었습니다. 당시 브래드는 서른 살로 선수로서는 고령이었고,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달 획득보다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올림픽 참가에 의의를 두고, 쇼트트랙 종목 특성상 상위권 선수들이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져 실격하고 하위권에 있던 선수가 어부지리로 올라가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에 혹시나 그런 행운이 있을지도 모르니 안전하게 경기를 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준준결승 결과, 2위 자리다툼을 하며 몸싸움을 벌이던 두 선수 중에 한 명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브래드는 사실상 꼴찌였지만 그래도 3등으로 경기를 마칩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앉아서 정리를 하던 그때 전광판에 결과가 뜹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브래드가 2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카메라 판독 결과 2위로 들어온 선수가 반칙을 한 게 드러나 실격처리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어부지리로 준결승에 진출한 브래드 버리. 이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행운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이번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한국의 김동성, 중국의 리자준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5명이 뛰는 준결승에서도 역시 2위 안에 들어야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준준결승 때보다 더 강력한 선수들을 보며 브래드는 이번에도 우승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사히 완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역시나 가장 꼴찌로 출발한 브래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상위권 선수들과 멀리 떨어져 경기 내내 혼자 꼴등으로 달렸습니다. 탈락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바퀴, 마지막 코너에서 상위권 3명이 서로 얽혀 다 넘어져버린 겁니다. 그들과 떨어져 있었기에 브래드는 넘어지지 않고 2위로 경기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1위로 들어왔던 선수가 반칙을 했다는 게 밝혀져 실격처리 되고, 결국 브래드가 1위로 결승에 진출하는 두 번째 행운이 일어납니다.
모두 브래드를 보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경쟁하는 올림픽, 거기서 실력으로 결승에 오른 쟁쟁한 선수들. 두 번의 어부지리로 이 자리에 선 브래드 버리가 이런 선수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운이 좋아 올라왔다고 무시당하며 또 꼴등으로 달릴 바엔 차라리 기권을 할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브래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오직 '완주'만을 바라보며 경기에 임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상위권 4명이 저 앞에서 달리고 브래드 혼자 동떨어져 맨 뒤에서 달리는, 모두가 예상했던 그런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어느덧 10바퀴를 다 돌고 이제 결승선까지 50m만 남은 상황, 더 이상 이변은 없을 줄 알았는데 금메달을 코 앞에 두고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납니다. 1위부터 4위가 서로 뒤엉켜 넘어진 것이죠. 그 덕에 홀로 맨 뒤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브래드가 1등으로 결승선 통과!!
이렇게 세 번의 어부지리 덕택에 브래드 버리는 2002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호주는 물론 남반구 전체의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이었습니다.
금메달 수상 소감으로 브래드는 "내가 경기에서 이겨서 받았다기보다는, 10년 동안 수고했다고 하늘에서 내려준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는 10년 동안 어떤 수고를 했을까요?
브래드 버리는 1973년 호주 퀸즐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퀸즐랜드는 1년 내내 아열대 기후인 곳으로 호주에서도 가장 더운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브래드는 쇼트트랙 선수가 되었습니다. 브래드가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호주인의 95%가 쇼트트랙을 몰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주에서 쇼트트랙은 알려지지 않은 운동이었습니다. 연습 환경 등 선수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시설도 열악했고요.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1991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호주 쇼트트랙 팀은 5000m 계주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여기엔 브래드 버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부지리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것 같지만 브래드도 호주 쇼트트랙 계에서는 나름 유망주였습니다.
그런데 1994년 경기 중 다른 선수의 스케이트 날이 브래드의 허벅지를 관통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일로 브래드는 피를 4리터나 흘리고 허벅지를 111 바늘 꿰맸습니다. 이후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는 데에는 무려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런 심각한 부상에도 브래드는 쇼트트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0년에는 훈련 중 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골절된 척추뼈 회복을 위해 한 달 넘게 머리, 가슴, 배를 철로 연결한 보호대를 착용하고 지내야만 했습니다. 의사들은 전신마비가 될 수도 있다며 경고하며 다시는 운동을 못할 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브래드 버리는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2년, "Do a Bradbury" 행운의 상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브래드 버리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포기했다면, '내 실력에, 내 나이에 메달 못 딸게 뻔한데 나가서 뭐 해' 같은 생각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어부지리로 진출한 게 창피해 중간에 기권했다면 이런 행운은 없었을 겁니다.
겨울 스포츠 불모지인 호주에서, 아열대 기후인 퀸즐랜드에서, 허벅지를 111 바늘 꿰매고도, 전신마비가 될 수 있는 척추 부상을 당하고도 쇼트트랙을 계속했고, 메달 가능성이 아예 없어도, 어부지리로 올라왔다고 무시당해도 완주를 해낸 브래드 버리! 행운의 여신이 브래드 버리에게 금메달을 선물한 게 이해가 됩니다. 비록 실력은 최고가 아니었을지언정 쇼트트랙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최고였으니까요.
좋아하는 일인데도 이런저런 상황을 핑계 대며 그만두기만 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며 저도 keep going을 다짐해 봅니다.
* 영국의 브래드 버리 독수리 에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