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귀퉁이를 살짤 접었다.
비가 그칠 기미 없이 내리던 토요일 밤, 사무실 불을 끄고 거리로 나왔다. 우산을 들까 하다 그냥 모자를 눌러썼다. 빗줄기가 목덜미로 스며드는 차가움이 오늘만큼은 의외로 괜찮았다. 빗소리가 자동차 소음을 눌러서인지 도시가 뜻밖에 낮은 볼륨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비 오는 밤이면 골목마다 임시로 생겨나는 익명의 통로들이 방향을 대신해 준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따라 걷다 보니, 간판 불이 절반쯤 꺼진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책과 잔을 함께 파는 곳 같았다. 문을 열자 눅눅한 종이 냄새와 묽은 위스키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손님은 셋도 안 됐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구석 선반에서 낯선 시집을 꺼내 한 페이지를 펼쳤다. 종이가 비 냄새를 마신 듯 축축했고, 시 한 편이 물기를 머금은 채 가만히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무심코 그 페이지 귀퉁이를 살짝 접어 두었다. 사지도 않은 책에 흔적을 남기는 건 예의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같은 페이지를 펼쳐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기분을 띄웠다.
바 테이블에는 투명한 잔들이 조용히 식어 가고 있었다. 바텐더는 주문을 묻지 않고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얼음 한 조각이 잔 속을 굴러다니며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붙었다 떨어졌다. 첫 모금을 삼키자 목구멍을 스치는 열기와 함께 바깥 빗소리가 잠시 멎는 것 같았다. 그때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젖은 소매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시선을 돌리진 않았지만, 잔을 들어 올리는 박자가 내 호흡과 미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를 때 생기는 작은 전류가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 사람도 한 모금 삼키고, 잔을 내려놓으며 유리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두드렸다. 유리잔이 내 잔과 공명하듯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그 소리 하나면 서로를 인식하기엔 충분했다.
두 번째 잔은 사양했다. 대신 물을 한 잔 더 받아 천천히 마셨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과정이 눈에 보였다. 그 사이 옆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나갈 때 잔을 비우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작별을 대신했다. 이름도, 목소리도, 연락처도 없었다. 그러나 잔과 잔이 맞닿지 않고도 귀에 맺힌 유리음만으로 밤의 체온은 공유되었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조금 더 가늘어져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방금 전에 접어 둔 시집의 페이지가 문득 떠올랐다. 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비에 젖은 종이가 스스로 펼쳐져 다시 평평해졌을까. 그 불확실성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도시에서 가장 확실한 건 종종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니까.
집까지 이어지는 길은 조용했다. 빗물이 고인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눕고, 그 위를 내 발소리가 가볍게 밀어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오늘 밤의 기록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젖은 모자, 접힌 시집 한 페이지, 그리고 맞닿지 않은 잔이 낸 유리음. 작지만 확실한 흔적들이 가슴 안쪽에서 달그락거렸다. 내일 아침엔 어떤 페이지가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작은 울림들은 비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