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은 묘하다.
월요일의 가속이 식어 버리고, 금요일의 들뜸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
오전에 두 개의 피칭을 마치고 나니 머릿속 톱니가 헛돌았다. 이럴 땐 억지로 책상에 붙어 있는 것보다, 물을 한 번 가르고 오는 편이 낫다.
강남 호텔 지하 풀에 도착한 건 16시 직전.
비즈니스 수트 차림의 투숙객들이 체크인 줄을 서는 사이, 나는 검은 에코백에서 새로 산 파스텔 블루 수영복을 꺼냈다. 유니클로 셔츠를 벗어 락커에 걸어 두고, 폰은 비행기 모드로.
물이 첫 호흡을 타고 피부를 감싸는 순간, 미팅 때 쌓인 미세한 적대감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앞서 헤엄치는 사람은 두 명뿐. 덕분에 물살이 거의 독점 상태였다.
열 번째 턴을 돌 무렵, 수면 위로 낯선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짙은 네이비 수영복에 어깨선이 또렷한—한눈에 봐도 운동을 오래 한 사람.
그가 옆 레인에서 속도를 맞춰 왔다.
물속에서 눈이 몇 번 마주쳤고, 나는 괜히 스트로크를 조금 더 길게 끌었다.
경쟁 의식이라기보다, 물 밖 사회적 거리두기를 물 속까지 끌고 오긴 싫었달까.
40분쯤 지나 둘 다 풀 가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평일 낮에 여유 있으시네요.”
“일하다 도망쳤습니다.”
“저도요.”
그는 커다란 물병을 내게 건네며 이름 대신 직업을 말했다.
패션 플랫폼 MD, 광고 담당.
브랜드 얘기가 슬쩍 섞이자 대화가 예상보다 오래 이어졌다.
낯선 사람과 긴 이야기를 하는 건 드문데, 물기가 중간 완충재가 되어 줬다.
락커룸으로 돌아가는 길, 그가 불쑥 물었다.
“퇴근 후에 한 잔 어떠세요? 근처에 단골 바가 있어요.”
보통이라면 정중히 고개를 저었을 거다.
낯선 만남, 즉흥적 약속—둘 다 내 체질은 아니니까.
그런데 물에 떠 있던 40분이 오늘의 규칙을 살짝 뒤틀어 놓은 모양이었다.
“수요일 밤에 한 잔 (이왕이면 샴페인...) 생각보다 괜찮네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걸, 나조차 조금 의아하게 느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나는 첫 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는 업계 뒷얘기를 적당히 간질이다 조용히 물러서는 센스를 가졌다.
사진 찍을 타이밍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잔을 들고 얼굴을 슬쩍 가렸다.
대신 테이블 위 버블을 폰으로 확대해 찍었다—내가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도 남길 수 있는 방식.
두 번째 잔쯤에서 야릇한 농담이 오갔고,
셋째 잔이 비워질 즈음엔 서로의 다음 계획을 묻지 않았다.
이 밤이 잠깐 튀어나온 괄호 안의 문장이라는 걸 묵시적으로 합의한 셈이다.
바를 나오니 수요일이 목요일로 기울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 큰 손을 내밀며 그가 물었다.
“다음에도 수영장에서 뵐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떤 의미의 질문인지 —굳이 규정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현관문을 열자, 오레오가 졸린 눈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깐 폰을 켜 메모장에 글을 저장했다.
“수요일의 물은 예상보다 차가웠고, 그 덕분에 밤은 의외로 따뜻했다.”
도시는 여전히 깨어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수요일이 끝나기 30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