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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생각나는..

웬 아이 워즈 21

by ㅇㄹㅇ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 시절, 우산을 일부러 잃어버린 채 캠퍼스 언덕을 내려오던 오후. 강의실 불빛은 멀리서도 형광색으로 반짝였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마음은 도통 생기지 않았다. 빗줄기가 셔츠 소매를 파고들면 “오늘은 공부보다 체온이 먼저”라는 암호가 자동으로 작동했다.

발길은 늘 학교 앞 중국집으로 향했다. 붉은 간판은 빗물에 번져 초록으로도, 주황으로도 보였고, 간판 불 아래 흘러내린 물방울이 탁자 위 단무지처럼 반들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름 냄새와 젖은 우산들 특유의 금속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메뉴판은 볼 것도 없었다. 연분홍 새우가 두어 마리 얹힌 간짜장 하나, 그리고 소주 두 병. 술병 목을 따라 흐르던 물방울이 하얀 그릇 가장자리에 떨어질 때마다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 면발에 간장이 배어들고, 소주가 목구멍을 적시는 사이, 빗소리는 창문 틈새를 두드리며 리듬을 바꿨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머릿속 강의 노트는 희미해지고, 눈앞 얼굴만 또렷해졌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고, 눈썹 끝에는 아직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 손가락이 먼저 닿아 조심스레 털어냈다. 접시 위 새우는 두 마리뿐인데, 우리는 서로에게 젓가락을 들이밀며 한 마리를 양보했다. 결국엔 술기운에 새우가 누구 입으로 들어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껴진 작은 체온만큼은 오래 남았다.

계산서를 집어 들면 어김없이 비가 더 굵어졌다. 우산은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코트 자락을 모자처럼 뒤집어쓰고 골목 끝 모텔로 뛰었다. 간판 네온이 빗물에 반사되어 마치 다른 행성 표지판처럼 흔들렸다. 프런트 벨을 누르면 “오늘도?” 하는 주인의 짧은 눈짓이 따라왔지만, 대꾸 대신 젖은 동전 몇 개를 카운터에 올렸다. 방 안은 늘 미지근한 냉기와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옷을 벗어 걸어 두면 소매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서로의 숨결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한동안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귀에 닿는 건 거칠어진 호흡과 매트리스가 내는 미세한 스프링 음뿐이었다. 불을 끄면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손끝으로만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도 젖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일 때면,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이름을 부르기도, 길게 말하기도 애매한 순간들이었지만, 대신 침묵이 정확한 대사를 대신해 주었다.

모텔 시계를 보면 늘 두 시간쯤 흘러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벽시계를 바라보다, “비가 좀 잦아든 것 같아”라는 말로 어색한 정적을 깨곤 했다. 하지만 사실 잦아든 건 빗줄기가 아니라, 우리 몸속을 뛰어다니던 열기였다. 젖은 옷을 다시 입으면 냉기가 스며들어 피부가 살짝 떨렸고, 그 떨림이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을 또렷하게 했다. 모텔 문을 나서면 골목 가로등 아래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그 위로 네온이 일그러져 떠 있었다. 헤어지기 전 짧게 맞잡은 손에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지만, 손을 놓는 순간 그 온기는 빠르게 증발했다. 마치 빗물처럼, 도시 공기 속으로.

그 기억이 오래 지나도 비만 오면 선명해진다. 지금은 수업도 없고, 학교 앞 중국집도 다른 간판으로 바뀌었고, 모텔 간판 네온도 사라졌지만, 빗소리만은 그대로다. 우산을 들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중국집 창문에 맺히던 김 서림이 떠오르고,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술기운에 접시 위 새우 한 마리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기억이 입 안에 짭짤하게 번지고,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오늘 밤도 비가 내린다. 우산은 들지 않았다. 이름도 남지 않은 그 시절의 열기가 빗속 어딘가에서 아직 미지근하게 증발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모자를 눌러쓰고 빗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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