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얼음이 녹아내린 틈

by ㅇㄹㅇ

요즘 들어 커피 맛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들어졌다. 목구멍으로 쭉 넘어갈 때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한 맛이 맞나?” 하는 의문이 따라온다. 희미하게나마 단맛이 감돌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쌉쌀한 이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마 내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지도 모르겠다.


이른 오후, 카페 창가에 앉아 얼음이 슬슬 녹아내리는 라떼를 바라본다. 밖은 쌀쌀한 햇볕이 온 도시를 잠식해가지만, 이 안에서만큼은 적당히 상쾌한 바람이 흐른다.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정작 내 시선엔 아무도 잡히지 않는다.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다. 상대가 내 옆자리에 앉아도, 그 목소리를 들어도, 나는 늘 상대를 ‘그 사람’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성별이나 관계 상태쯤은 이제 별 흥미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굳이 이름 붙여 가며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얼마 전까진 헬스장보다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르는 게 좋았다. 그러나 갑자기 ‘요가’도 끌리고, 이틀 전엔 다시 케틀벨을 사들이고 말았다. “계속 그러다 다 관두는 거 아니야?”라는 어느 지인의 핀잔에, 나는 그저 애매하게 웃어 넘겼다. 애초에 이 몸뚱이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영혼 같은 걸지도. 하지만 떠돌아다니며 틈틈이 근육통을 얻고, 그 통증 덕에 하루를 조금 더 확실히 느끼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관계도 그렇다. 때로는 누군가의 육체에 끌리고, 때로는 그 사람이 풍기는 향에 홀리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의 온도에 취해 있다 보면, 문득 무언가 ‘더 진한 것’을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 감정이 섹스일까, 사랑일까, 단순 호기심일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거나, 전혀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결론이 날 뿐이다.


어느새 얼음이 다 녹아버린 라떼를 마주하고, 나는 또 한 번 씁쓸하게 웃는다. 달아야 할 것과 써야 할 것이 뒤섞인 채, 초콜릿 가루 몇 점만 위에 둥둥 떠 있다. 언젠가 관계라는 것도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겠다. 달콤하지만 서서히 쓴맛이 배어드는 무언가로.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열기를 평온하게 유지하는 잠시의 오아시스일 뿐이거나. 뭐든 상관없다. 내일이면 다시 다른 운동, 다른 카페,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테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끔이 아니라 매일 오레오와 대화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