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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pm

by ㅇㄹㅇ

오늘도 점심을 대충 때우고 들어오자마자, 사무실 문 옆자리에 있는 사람과 몇 마디를 나눴다. 내가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었는데, 왠지 그 사람의 분위기에 이끌렸다고 해야 할까. 세련된 옷차림, 마치 체육관보다는 요가 스튜디오를 즐겨 다니는 몸매, 그리고 어쩐지 섹시하게 느껴지는 태도. 근데 참 이상한 게, 막상 말을 붙여 보면 별로 특별한 내용도 오가지 않는다. 누구의 이름이 어쩌고, 오후에 회의가 몇 시라는 둥. 하지만 그 사람은 늘 마지막에 “오늘은 어딘가 피곤해 보이네요” 따위의 말을 남기고, 가볍게 미소 짓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마치 내가 ‘피곤해 보이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게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잔소리마저 신경 써주길 바라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사실 피곤해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요즘 잠들기 전에 괜히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켜놓고, 어쩌면 누군가의 허무맹랑한 하루 일과를 엿보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자칭 ‘뷰티 크리에이터’라는 사람의 스킨케어 루틴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싶다가도, 끝내 지루하지 않게 끝까지 보게 된다. 아마 스스로를 더 가꾸고 싶으면서도, 귀찮아 죽겠다는 마음이 반반씩 섞여 있는 탓일 거다.


가끔은 사무실이 아니라 카페에서 근무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평소엔 잘 의식하지 않던 내 체형이라든지, 헤어스타일이라든지, 옷 매무새 같은 것이 은근히 신경 쓰인다. 카페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으면, 누군가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내 모습을 흘끗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운동 좀 해야겠어”라든지 “오늘 외출용 화장품 제대로 안 발랐네” 같은 자조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런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나” 싶은 냉소가 뒤따르면서도, 막상 주변 시선이 느껴지면 부랴부랴 머리를 정리하게 된다.

바로 그때, 어제와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퇴근 후에 뭐 해?” 별다른 내용은 없으면서도, 괜히 이심전심을 노리는 듯한 질문. 사실 요 근래 살짝 설레는 중인데, 문제는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경계가 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거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건 맞는데, 그게 단순한 ‘즐거운 시간’을 향한 욕망인지, 아니면 “너와 나,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어”라는 신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의 시선이나, 우연히 스친 손끝의 감촉이 아주 은근하게 감정을 부추기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뒷머릿속에서는 늘 “이러다가 큰 후폭풍이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맴돈다. 겁 많고 심약한 부분이 튀어나오는 거다. 스스로는 시니컬하고 무심한 척 굴지만, 사실은 별것 아닌 말투나 표정에도 마음이 동요되는 걸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 한 번뿐인데, 조금쯤은 설레는 게 뭐 어때”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그런 어중간한 감정선을 어떻게든 가누며,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업무 문서에 집중하기가 영 쉽지 않다. 회의 자료를 만들면서도 머릿속은 헬스장 대신 요가 스튜디오를 찾고 싶은 마음, 카페에서 시선을 모조리 끌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메시지 속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뒤엉켜 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저녁 전까지,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사라질까. 그러면서도 나는 문득, “아마 이 모든 일이 꼭 나쁘진 않을 거야”라는 낙관에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복잡하고, 욕망이라는 건 대개 숨겼다고 생각해도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내일이면 또 다른 변덕스러운 이슈가 날 찾아올 테고, 나는 그날도 적당히 피곤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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