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자고, 전날 데이트룩을 미리 세팅해놓고, 대화창을 보고 또 보며 실실 쪼개는, 중증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내게는 딱 한 번 있다.
그는 언어가 아름다운 남자였다. 말하는 언어 하나하나 깊이가 있고 진중했으며 글은 참 매끄럽고 담백했다. 영업 사원처럼 단순히 겉만 화려한 언어가 아닌, 그 사람이 선택한 단어에는 지식이 있었고 기품이 있었다. 그의 지조 있는 언어들은 나를 퍽이나 설레게 했다. 난 그의 언어에 반해 만남을 시작했고, 하루하루가 핑크빛이었다.
한참 그의 매력을 알아갈 때쯤, 그는 날 서점으로 데려갔다. 책을 함께 보며 데이트를 했는데, 그는 작가인 나보다 한참 더 책을 많이 읽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난 방송에 관련된 책만 읽었다. 예를 들어 요리 프로그램을 하고 있으면 요리 프로에 대한 책만 읽고 여행 프로를 하면 여행 책만 읽는 식이었다. 주로 위클리 방송을 하다 보니 매주 볼 자료가 많아 방송 외에 서적을 읽을 시간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쉬는 시간에 글자를 더 이상 보기 싫었다, 지겨워서. 그런데 그는 고전 소설, 현대 추리소설 그리고 매년 문학상을 받는 작품들까지 소설을 고루고루 읽고 있었다. 그는 꽤 당연하게 이거 읽어봤어?라고 물었지만, 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어서, 그날 데이트가 참 화끈거렸다.
며칠 후 그를 또 만났다. 그날 그는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하도 내가 책을 안 읽으니깐 이젠 네가 사 오는구나란 민망함에 괜스레 뾰족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툴툴 대고 있었는데, 그가 골라온 책을 보곤 마음이 싹 누그러졌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
당시 이 책은 출간되지 좀 지나, 인문학 코너에 가야만 고를 수 있는 책이었다. 즉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주워 온 건 아니었다. [여덞단어]는 기존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는데, 평소 시간이 없어 많은 작품을 못 읽는 내가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책을 읽을 때 못 된 버릇이 있는데 문장이 조금이라도 길거나, 쓸데없이 형용사가 많으면 중도에 책을 덮는다. 근데 [여덟 단어]는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다. 방송작가는 사람들의 말을 글로 옮기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짧고 임팩트 있는 문장을 선호한다. 그래서 형용사가 지나치게 많은 소설가의 문장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방송작가처럼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카피라이터의 문장은 참 편안하고 매끄러웠다. 즉 문장이 나의 톤과 맞았다.
난 책 선물이 가장 어려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상당한 독서량이 있어야 상대방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줄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선물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분야, 선호하는 문장 스타일, 책의 두께까지 꼼꼼히 살펴봐야만 완벽한 선물을 할 수 있다. 근데 [여덟 단어]는 정말 지극히 내 취향이었다. 이 정도의 센스를 가진 남자라면 사랑해도 될 것만 같았다. 책 한 권에 난 홀랑 그놈에게 넘어갔다. 그때까지 단순한 설렘이었던 내 감정은 사랑으로 바뀌었고, 꽤 뜨겁게 오래도록 사랑했었다.
어떤 연애던 끝나면 잔향이 남는다. 그건 사랑의 무게와도 같아서 누군가의 향은 다이소 향수처럼 금세 공기 중에 흩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의 향은 베갯잇에 깊게 파고들어 아주 오래오래 코끝을 스친다. 언어가 아름답고 책을 좋아하던 그놈은 향은 아주 묵직하다. 3년이 지난 아직도 내 베갯잇에 향이 종종 스치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