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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법대로 한다 Feb 24. 2020

베프는 3년 주기로 바뀐다

아침부터 시작한 녹화가 새벽 2시가 돼서야 끝났다.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우린 본능적으로 눈빛이 찌릿 통했다. 그렇게 메인언니와 막내를 제외한 서브 셋은 택시를 잡는 척하다가, 여의도 공원에서 접선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우면 20시간은 너끈히 잘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피곤함이 수다의 욕구를 이겼다. 아니, 우린 그날 입을 털어야만 잘 수 있었다.     


여의도 공원 정자에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조약 한 안주를 펼쳐놓고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으로 노상이란 걸 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맥주 한 잔에 뒷담화까지 완벽한 조화였다. 다들 녹화 내내 참고 있었던 불만을 미친 듯이 터뜨리다 급기야 우린 7시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마주쳤다. 직장인들은 우릴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봤고 우리 벌게진 얼굴로 민망함에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버스를 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우리 셋은 매일 10시간 이상을 봤고 그것도 모자라 퇴근 후 새벽까지 늘 함께하곤 했다. 그 당시 그들은 내 베프였다. 그런데 그렇게 친했던 이들이 지금은 뭐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후 각자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갔고 바쁜 스케줄 탓에 서로 메신저로만 연락하다 어느 순간 그 빈도수도 줄어 이제는 베프에서 타인이 됐다. 방송작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인간관계도 끝나는 일회용성 인연. 한때는 이게 참 씁쓸했다. 내가 정규직 평생직장을 다녔으면 좀 달라졌으려나?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내 베프는 3년을 주기로 바뀌었다. 여기서 베프의 기준이란 당시 연락을 제일 많이 했던 사람을 일컫는다. 대학교 때는 대학 다니는 친구랑 일상을 나눴고, 막내 작가 때는 동기랑, 혹은 연애사를 공유할 수 있던 친구로 계속 내 일상을 가장 많이 공감해 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게 보통 길어야 3년 주기로 끝났다. 처음에는 공통사가 있어 친해졌던 이들도 3년이 지나면 서로의 상황이 바뀌어, 질투하기도 하고, 공감대가 적어지고 해 차츰차츰 멀어졌다.     


특히 여자들의 베프는 3년 주기란 말에 공감하는 게, 여자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 서운함도 크고 질투심도 크다. 즉 민감하기에 관계 속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남자보다 크다. 3년이면 서로의 사생활을 다 알기에 질투심도 쌓일 만큼 쌓이고, 단점은 더욱 부각돼 보이는, 권태기 시즌이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고생으로 유대 관계를 맺었다면 더 빨리 식을 확률이 크다. 서로 뜨겁고 빠르게 가까워졌기에.     


인스턴트 베프에 한 때 서글펐던 적이 있다. 내가 인복이 없는 건가, 왜 난 친구가 없지라고 한탄했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놓기로 했다. 그녀와 내가 세월이 흘러 또 하나의 공통사가 생기면 다시 친해질 거란 생각에, 인연이 끝난 게 아니라 이어가는 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한 커피 같은 친구가 있다. 늘 마시는 커피처럼 강렬한 맛은 아니지만 안 마시면 머리 아파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는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진짜 리얼 베프가 있다. 이 친구와의 세월을 살펴보면 우리가 처음부터 베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땐 각자 친했던 친구가 더 있었고, 대학 때는 서로 바빠 안부를 묻고 간간히 만나는 정도였다. 그 이후 우린 오해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온갖 정과 에피소드들이 뭉쳐 지금은 연락이 뜸해도 서로 마음속에 품고 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인생 베프가 되기까지 우리에게도 권태기 시즌이 있었고, 성수기가 있었고, 비시즌도 있었다. 이를 거쳐 완벽한 관계로 거듭났다.    

 

근데 이 친구가 최근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미혼 친구 하곤 대화가 안 통해 멀어진다는 말에 살짝 걱정이 되지만, 내 친구가 잠시 다른 이와 더 많은 연락을 해도 이젠 서운해하지 않을 거 같다. 우린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고 이미 많은 공통사가 있기에 다시 맞춰질걸 안다.     


3년의 인연이 끝났다고 서운해하지 말자. 그 친구와 인연이라면 6년 차에 다시 베프가 될 수 있으니, 그저 흘러가는 데로 두자. 이 또한 그녀와 내가 맞춰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자. 인연이면 다시 맺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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