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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차를 사줬다

by 내 법대로 한다

우리 부모님은 ‘신상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자가는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 차는 늘 중고였다. 아빠는 한때 은행원이었다. 하지만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한 지 20년. 그간의 풍파들도 잦았으니 서울에 집 한 채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기적.


이렇게 험난한 시절을 살다 보니 ‘새 차’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는 면허를 땄다. 그리고 몰고 온 첫 차가 지인이 운전연습 하라고 준 30만 KM 뛴 차. 분명 잠깐 운전하라고 준거였겠지만 우린 그 차를 3년은 더 탔다.


두 번째 차가 지인에게 산 10만 KM 뛴 SM5. 이것도 10년은 탄 거 같다. 결국엔 차가 멈춰서 바꾼 걸로 기억한다. 이쯤 되자 회사에서도 보기 안쓰러웠는지 회사 차를 제발 끌고 다니라며 차를 선물해 줬다. 그렇게 받은 게 그랜져. 이것도 20만 KM를 탔다. 고마운 인연들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항상 차가 있었다. 지금도 감사하다. 하지만 문제는 주변의 시선.


'차 좀 바꿔, 바꿀 때 지났네'

'우린 차 바꿨는데, 언니도 바꿔야 하지 않아?'

자랑 플러스 살살 긁는 인간들이 꼭 있었다.

그리고 차가 오래되다 보니 기능면에서도 차이가 났는데, 한 번은 부모님이 고급 호텔에

놀러 갔는데 다들 트렁크를 자동으로 내리는데, 우리만 쾅 닫아서 괜히 민망했다는 귀여운 에피소드까지


물론 안전도 문제였다. 가뜩이나 감각도 느린 아빠가 안전센서와 주차 카메라가 없는 차를 운전하는 게 불안했다. 그래서 개미 같은 월급을 모으고 모아서 새 차 사주기를 결심.


야심 차게 대리점을 방문했다. 사실 자동차 대리점 방문 자체가 부모님에겐 첫 경험. 그렇게 g80에 시승을 했다. 난 그동안 대리점 직원과 견적을 뽑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차에서 내리질 않는다. 둘이 드라이브 간 줄. 처음 타보는 새 차가 그렇게 좋았나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차를 살 수 있다는데 모든 게 처음인 우리는 하나하나 옵션을 들어가며 차 계약을 하고 왔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왜 안 자?'

'내가 이 차를 타도 되는 건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인생을 다 이룬 거 같아'

'벤틀리도 아니고 g80에 뭘 그래'

어색해서 괜히 농담을 던졌지만, 엄마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를까. 종종 차로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60개월 차를 할부로 차를 사도 좋은 차를 몰면 능력 있는 사람. 오래된 차를 몰면 능력 없는 사람.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안쓰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한테 이제 해방이다. 유지하지만 나도 맞대응이다.


그간의 서러움을 새 차의 비닐을 뜯으며 다 털어냈다. 60대 후반에 처음 뜯는 새 차 비닐. 아빠의 마지막 차가 중고가 아니라 참 다행이다. 그리고 자존감 레벨업 된 엄마의 한마디.


'그동안 내 딸 능력 있다고 자랑했는데, 아줌마들이 안 믿고 너 백수로 봐서 열받았는데 그것도 이제 해방이다'

집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프리랜서였는데... 백수가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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