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쉬어가기

죄책감 없이 쉬는 하루

이번 주말에 시작해봐요

by 소감

요즘 나는 잠을 못 잔다. 밤늦게까지 잠을 못 드는 나는 정신과를 찾았다. 선생님은 ‘누구 씨, 이번 주는 죄책감 없이 쉴게요.’라고 처방했다. 의문문도 아니고 명령문도 아니었다. 가까운 미래의 나에게 죄책감없이 쉬자고 선생님이 대신 약속해주는 문장이었다.


이번 주는 죄책감없이 쉴게요.

그 말이 마음속에 슬쩍 들어와 나가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쉬면서 얼마나 자주 죄책감을 가질까? 주말에 나의 모습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기상

이번 주말엔 눈을 떠보니 점심이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이것저것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시작부터 다 꼬여버렸다. 잠으로 흘려보낸 금쪽같은 오전 시간이 아깝고 허무하다. 주말을 이렇게 시작한 내가 한심하다.


삐—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나도 모르게 성스러운 휴일의 시작을 자책으로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내가 언제 또 오전까지 늘어지게 자보겠나. 평일에 꿈도 못 꾸는 늦잠을 잔 것이니 이것으로도 잘한 것이다.

식사

오늘은 움직일 힘도 없으니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시켜보려고 했다. 돈가스를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 족발을 먹을까 고민했다. 돈가스는 일어나자마자 먹기엔 소화가 어려울 것 같고, 초밥은 배달시키면 밥이 딱딱하고, 족발은 느끼할 것 같아서 그나마 무난한 초밥을 시켰다. 초밥을 먹는데 밥이 딱딱하고 맛이 아쉬웠다. 돈이 아까웠다. 이럴 거면 돈가스나 족발을 먹을걸 후회를 하며 마지막 초밥을 삼켰다.


삐— 이 부분도 경고다. 나는 내가 선택한 식사를 하면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후회만 했다. 돈가스를 먹었다면 역시 소화가 안되잖아, 족발을 먹었다면 역시 느끼하잖아 하면서 후회했을 것이다. 난 주말의 시작이 꼬여서 지금 무얼 해도 나를 스스로 혼내고 있다. 지금 상황에선 나는 뭘 먹어도 만족할 수 없다.

할 일

밥을 다 먹었다. 오늘은 빨래를 돌리고 집 구조를 바꾸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 목표다. 나는 먼저 넷플릭스를 켰다. 평일에 출근하느라 못 봤던 ‘기묘한 이야기’를 틀었다. 대충 걸터앉아 보다가 내용에 몰입해서 어느새 시즌 하나를 끝냈다. 창밖을 보니 벌써 저녁이다. 빨래는커녕 아무것도 못했다. 오늘 하루는 몽땅 시간을 낭비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한 하루가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날 좋은 주말에 취미 활동도 하고, 화분도 가꾸고, 일주일 동안 먹을 장도 보면서 밀린 집안일도 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 비해 아무것도 못했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무의미한 하루를 보냈다.


삐— 마지막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린다. 나는 정말로 오늘 하루 아무것도 못한 것일까? 평일에는 꿈도 못 꾸는 늦잠도 잤고, 평소에 보고 싶었던 드라마도 정주행 했다. 아무것도 못한 하루가 아닌데 나는 스스로를 하루 종일 티브이나 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자책했다.


죄책감 없이 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조건 계획대로 움직여야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만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하는 내 강박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생산성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을 못 견디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맞다. 나는 보통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지금 자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튜브를 하나 더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한 번 더 하고, 가십거리 연예 뉴스를 하나 더 봤다. 뭐라도 하나를 더 해야 내 마음이 편해졌다.


강제로 눈이 감길 쯤에는 온갖 걱정이 쏟아졌다. 핸드폰 보는 시간에 못했던 진짜 걱정들이 찾아온다. 오늘 점심때 했던 이야기가 과하지는 않았나,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 가족들의 건강, 퇴사하면 어떤 돈으로 살지, 내가 생각보다 무능력한데 어쩌지 기타 등등. 걱정해봤자 당장 해결되지 않는 수 만 가지의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서 나는 잠에 들지 못했던 것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는 정말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생각한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으니 느릿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고 자책의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걸 지도 모른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친구들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해보면, 꽤 많은 친구들이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어서 잠에 못 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도 휴일에 무계획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번 주말에 시작할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의 고개를 끄덕인 당신들. 그런 당신들과 나는 이번 주말에 죄책감 없이 쉴 거다. 계획 없이 시간을 보내고, 밀린 집안일을 못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과감하게 생각을 자르고 자리를 뜰 것이다.


쉬는 것은 그냥 쉬는 것. 평일 내내 바쁜 우리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획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자신에게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쉬어보나.’ 하며 너그럽게 이해해줄 것이다. 푹 쉬게 된 머리와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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