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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키노 Jun 21. 2020

스페이스 0.01

전화위복(轉禍爲福)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고 오늘도 세상은 무심하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오늘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향해 가야 할까. - 2XXX년 0월 0일


"관리 구역 Z-01, 배식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육 중인 그들에게 하루 치의 식량을 배분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된다.

낡고 녹이 슨 철제 다리를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구역질이 난다. 이것이 바로 혐오감인가? 혐오감은 분명 본인보다 하등하거나 가치가 없는 존재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니, 틀리진 않은 듯하다. 본인이 우월하다고 자만하던 자들의 최후는 이러하다.


우리와 그들의 싸움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난 지성과 기술력으로 오랫동안 우리 세계를 위협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공생하길 원했기에, 항상 기회를 주고 먼발치에서 그들의 결단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이 방관하고 묵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비록 그들이 놀라운 과학 기술력을 지녔을 지라도 우리에겐 그들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우리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에게 승리의 여신은 미소를 짓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만의 의지를 품고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그들을 굴복시켰다. 엄청난 힘 앞에서 무릎 꿇고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에 연민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지만, 우리 세계에 활용할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부터 사육이 시작된 것이다.


"식사를 마친 자들은 제1관리구역 플랜트로 이동하도록."

배식 시간은 30분 남짓이나, 사실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분만을 공급했고,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그들은 배식을 받고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자유를 빼앗기고 구속당한 생명 속에서 '의지'의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곧 그들은 인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겠지. 우리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더는 못 해. 으아아아악."

개중에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우리의 명령을 거부하고 구역을 탈출하려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스페이스 0.01에서 우리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없다. 명령을 어긴 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형을 집행하기 위한 절차 따윈 없다. 과거에 그들이 우리의 일부를 무자비하게 죽인 것처럼. 그들은 그것을 '약육강식'이라고 부르는 듯했지만, 자신들의 욕망과 탐욕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섭리를 취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저 악의로 가득 찬 그들의 속내에 다시금 혐오감이 차올랐다.


"거기, 01003번."

평소에 눈여겨보던 자가 마침내 앞을 지나가던 참이라 불러 세웠다. 한 손에 낡은 메모지와 펜을 든 그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쉬는 시간에 무언가를 적는 듯했다. 그들이 이룩한 초문명사회의 모든 기술력을 빼앗긴 뒤, 찢긴 종이조각과 잉크가 닳은 펜에 의지해 지금의 상황을 기록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기록이 계승될 '미래'가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행위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었다.


"오늘은 무얼 적었지? 동료가 죽음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

"아닙니다."

"그럼 평소에 대체 뭘 적는 건가?"

무력으로 쉽게 제지하고 빼앗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록'이라는 행위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거기에 강제적인 힘을 가하고 싶지 않았다.


"의미 없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것들이라... 구체적으로?"

"그야, 지금 우리의 삶이죠."

"자유를 빼앗기고 종속된다고 해서 삶의 의미까지 사라지나?"

"삶의 시작과 끝은 정할 수 없지만,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여정은 정할 수가 있죠. 그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빼앗았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하지만 이젠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군."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겉으로만 강한 척했던 걸지도요. 내면은 그저 흐르는 대로, 의미를 잃어가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것 같군요."

"그럼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할 건가?"

"끝을 정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스스로 정하고 싶을 때가 있죠."


며칠 후, 관리 구역 Z-01에서 싸늘한 주검이 발견되었다.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여, 생명에 위협이 될만한 물건을 모두 회수하였는데 이 자는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거둔 것일까. 문득 그가 늘 소지하고 다니던 메모장과 펜이 떠올랐다.

그가 숨을 거둔 침대맡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메모장과 촉이 새빨갛게 물든 펜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메모장의 한 페이지에 시선이 갔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이라고, 우리는 파멸의 길을 걷고 있더라도 어떤 존재에겐 그것이 전화위복일 수 있다.

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삶을 지속할 자신이 없다. 

마지막으로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해 기록해둔다.

여기는 지구, 내 이름은 K,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2XXX년 0월 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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