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든 음악이든 글쓰기든 하얀 종이 위에서 시작된다.
캔버스 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리거나 가사를 써 내려가고, 컴퓨터나 자필로 낙서처럼 생각나는 대로 초고를 적어본다. 흰 종이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다양한 감각들을 일단 순서 없이 나열해 보면서 하나씩 정리를 한다. 그러는 와중에 새로운 생각들이 추가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추상적 개념들이 펜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형태화 된다.
지우고 고치기를 몇 번씩 반복하면서 밑바탕을 마음에 들게 다듬으면 다음은 본격적으로 색을 입힐 차례다. 색색의 물감과 때로는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정성껏 색칠을 한다. 그리고 오선지와 백지 위에 평면으로 존재하는 음표와 가사들에 드럼과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등의 악기 소리를 입히고 거기에 전자음을 추가하고, 노랫소리를 입히고 또 화음을 추가하면 어느새 음표와 가사는 생명을 품고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편 밑바탕을 그럴듯하게 다듬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엉성하기 짝이 없는 초고를 읽고 또 읽으며 수 차례 백스페이스와 엔터키와 지우개를 사용하여 낱말에 불과했던 글자들을 하나의 의미를 지닌 유기적인 집합체로 통합시켜 간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이렇게 무언가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을 처음부터 잘할 리가 없을뿐더러, 단번에 성공할 수도 없고 엄청난 대가와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하루, 며칠, 일 년, 아니 몇 년, 어쩌면 수십 년이라는 완성까지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작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의 뒷면에 존재하는 희열과 행복감을 희미하게나마 느꼈거나,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거침없는 의욕은 본능과도 같아서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을 묵묵하게 이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먼발치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빛을 따라 다다른 곳에는 생명을 갖게 된 하나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의 육체와 현실화된 생각이 만나게 되는 곳. 완성된 작품을 보고 만족할 수도 있고, 또 한 번 좌절을 경험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도 있다. 이 작품이 타인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일까? 수백 번의 자문자답 끝에 결론을 내리고, 드디어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타인과 세상에 공유한다. 70억 명의 사람 모두가 자신의 이미지에 공감해줄 수는 없지만, 단 몇 명이라도 긍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창작의 고통을 뛰어넘는 희열이 아니겠는가?
창작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정점에 서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다. 하지만 이것은 슬프거나 안타까운 사실이 아니다. 정점의 의미가 성공이라는 의미로 변질되고 이를 이루기 위한 맹목적인 창작활동은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창작의 진정한 목적은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 외부의 환경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표현하여 그것을 공유하는 데 있다. 창작활동에서 정점의 의미는 창작에 수반되는 일련의 고민, 고통과 싸워 이겨내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도 자신만의 정점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비틀스의 렛잇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이 모든 작품도 처음에는 흰 종이 위에 한 줄의 선과 단어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도 창작활동에 인생과 열정을 바치고 있을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