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번역 프리랜서
나는 학업을 마친 후 바로 취업했고 이직을 포함해서 약 7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2018년 12월 31일,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전업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었다.
1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까진 다른 부업을 하지 않고 번역 일로만 먹고살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회사를 관둘 때 번역 일로 수입을 얻지 못한다면 알바도 각오했었으니까.
게다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시국이 이래서 일감이 없는 거 아니야?"인데,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다.
각설하고, 사실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기도 살짝 무안한 프리랜서 2년 차 번린(번역 어린이)이지만,
지난 1년 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을 직장 생활과 비교하면서 적어볼까 한다.
또 한 해가 지나고 2021년에 이 글을 다시 읽을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상상하면서...
아래 내용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케바케!(case by case)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자 경험담이므로 반드시 케바케를 염두에 둘 것.
-늘 그렇진 않다. 특히 자리를 잡아야 하는 초반에는 사생활을 버리고 일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프리랜서는 직장인에 비해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업 프리랜서가 되면 초반에는 일이 없어서 한가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지난해 초에 내가 그랬다. 일이 있으면 일주일에 한 건, 없으면 2주 넘게 놀기도 했다.
사실 이때가 정말 좋을 때이니 열심히 본인 어필을 하고 부족한 공부를 해 두어야 한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일이 없다고 멍 때리면서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라고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서 말하고 싶다.)
이때가 그나마 시간을 나름 자유롭게 할애할 수 있다.
거래 업체가 하나둘씩 생기고 번역일이 슬슬 궤도에 오르면 자유 시간은커녕 내 생활이 거의 없어진다.
일감 의뢰에 대한 칼 답장, 칼 납기는 기본이라 항상 폰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봐야 하고 번역사를 구하는 곳이 없는지 수시로 구직 사이트를 체크해야 한다.
한 가지 일화로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알라딘)를 보러 갔는데 하필 영화 상영 전 광고 타임에 자주 의뢰를 주시는 감사한 피엠(PM, 프로젝트 매니저)님이 5~10분 안에 끝낼 수 있는 짤막한 일감을 asap로 날려 주셨다. 상영관을 뛰쳐나와 부디 영화 시작 전에 끝내고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부랴부랴 번역을 보내고 상영관에 들어가 보니, 알라딘과 재스민 공주가 이미 아는 사이더라(...)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번역 회사는 번역사가 지금 영화를 보는지, 화장실에 있는지, 자는지, 쇼핑을 하는지 모를뿐더러 번역사의 사정을 모두 감안하면서 일을 주진 않으므로 번역사도 본인 사정을 모두 챙기다 보면 일감을 놓치게 된다.
일감이 절정이었을 때는 한 달 반 정도 평일, 주말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서 일만 한 적도 있다. 이대로 가다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가까운 곳으로 떠나 머리를 식히면서 여행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를 우선순위로 찾아주는 단골 업체를 여러 곳 확보하기 전까지는 절대 자유롭지 않으며, 직장인보다 더 바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단골 거래처 만들기 ~ing 중이라서 집 밖에 자주 나가지 못한다 ㅋㅋ
아, 그런 건 있다.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만 일할 때 프리랜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을 가서도, 카페에 가서도 인증숏 하나 멋들어지게 찍고 일하는 자유는 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여행 가서는 놀고만 싶고, 카페에서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레퍼런스, 캣툴, 인터넷 창을 돌려보면서 일하려니까 속이 터지더라. 히히.
-병행하는 사람도 많은 걸로 안다. 하지만 나는 전업파다.
이건 개인 사정이 많이 작용하는 부분이라서 정답을 언급할 수 없는 문제이자 정답이 없는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딱 하나, 일로만 놓고 보면 난 무조건 전업파다.
직장과 병행하는 이유가 돈(프리랜서의 불안정한 수입) 때문일 수도 있는데, 이에 관련해서는 3번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두기 전부터 번역 회사에 이력서를 돌렸고 적게나마 번역 일을 병행했었다. 내 경험상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되면 우선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몸이 피곤하면 필연적으로 번역 퀄리티가 낮아지고 실수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실수는 번역사 본인만 모른다. 왜냐면 출근하기 전까지 시간에 쫓겨서 빨리 납품해야 하니까.
번역은 생각 이상으로 훨씬 육체적,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며 공들여서 작업을 하면 시간이 꽤 소모된다. 몇 개월 동안이야 이런 생활을 버틸 수 있더라도 1년? 2년? 과연 버텨낼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
이 말에는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취미 삼아서, 간단한 용돈 벌이 정도로 생각한다면 물론 직장과 병행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프로 번역사를 목표로 하겠다, 역서 몇 권을 내겠다, 한 달에 몇 글자 이상 수주를 받겠다, 처럼 번역사로서의 목표가 뚜렷하다면 내 시간을 온전히 쏟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얼마나 버는지는 3-4년 정도 후에 여전히 내가 전업 번역가라면 그때 다시 쓰겠다.
고작 2년 차에 나 얼마 벌어요! 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이야기는 얼마나 버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넘겨도 된다.
중요한 건 안정적인 연차에 도달하기 전까지 버텨낼 수 있는 돈(과 계획)이 있는가이다.
만약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모아둔 돈도 별로 없고 번역 경력도 없는데 전업을 해볼까요? 한다면 강력하게 말리고 싶다. 여러분을 위로해 주는 건 번역을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돈이다. 돈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며 심적 안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프리랜서 초반에는 휑한 스케줄과 뚝뚝 떨어지는 샘플 테스트로 인해 멘털이 쫙쫙 갈라지는 시기다. 거기에 먹고 살 돈까지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 현실의 벽을 느끼고 재취업, 또는 다른 길을 알아볼지도 모른다. 돈은 이러한 현실의 벽까지 (잠시나마) 부수어준다!
난 덕질과 먹는 것에 대부분의 돈을 투자해서 근속연수에 비해 모은 돈이 없(... 여기까지)
하지만 전업 프리랜서의 길을 결정하기 전에 2년 정도 죽지 않고 살 정도의 자금과 한 달에 얼마씩 쓰겠다는 계획, 만약에 번역 수입이 계속 없을 시에 어떻게 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세우고 직장을 그만뒀다. 이왕이면 플랜 B까지 있으면 더 좋다. 천만다행으로 1년 차부터 수입이 생기기 시작해서 아직까진 재취업과 부업을 하고 있진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더 중요하겠지만.
그리고 1년 동안 버티기 진짜 힘들었다. 일감은 한정되어 있는데 신규 번역사들과 번역 업계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줄지 않는다. 나보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은 아마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고, 일감을 잘 주다가 어느 순간 연락이 없는 업체가 생길 때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보다 더 잘하는 신규 번역사가 나타난 걸까? 내 메일 답장이 너무 늦었던 걸까? 이러한 '전전긍긍'은 일상생활이 된다. 그러니까 얼마까지 벌 수 있는지 궁금해하기에 앞서 얼마만큼 벌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내가 버틸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해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얼마까지를 벌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면 단가가 높은 번역회사에 많이 등록해서 일을 받으면 해결된다! 자세히는 말할 수는 없지만, 번역 단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 요리조리 잘 찾아서 부디 단가가 높은 회사와 많은 거래를 트시길!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덕담은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점은 수직적인 보고(결재) 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일이 바로 보고와 결재였다.
"내일 00시까지 보고 자료 준비해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폭풍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고 사원-대리-과장-부장-부사장-사장 결재 라인을 타는 중에 "다시", "이거 다시", "이 수치 잘못됨"하면서 줄이 쫙쫙 그인 보고서를 되돌려 받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프리랜서 세계에 보고 체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번역사는 상황에 따라 피엠에게 번역에 관해서 보고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질문을 해야 할 때도 있으며 (리뷰나 클레임 건에) 반박을 해야 할 상황도 생긴다. 다만 직장처럼 수직적인 구조가 아니며 사원-대리-과장 직급대로 결재를 받지도 않는다.
다만, 수직 체계는 트러블이 발생해도 직속 상사의 실드? 와 함께 팀 책임으로 분산되는 반면, 번역가는 번역회사를 거쳐서 납품하더라도 번역 트러블에 대한 책임 부담이 좀 더 큰 느낌이 들었다. 물론 번역가와 클라이언트가 1:1로 직납 하는 상황엔 이러한 리스크가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번역해야 하고 직납은 더 신경 써서 해야 한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마다 내가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좋은 것은 회식이 없다는 점.
이건 구구절절 이유를 적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장점 중에서도 탑 오브 탑, 출퇴근이 없다는 것!!
출퇴근이 없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50% 정도는 향상된 것 같다.
한 번씩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그들과 반대로 걸어갈 때,
오후 2시~3시쯤 잠이 솔솔 쏟아지는 시간에 커피를 사서 들고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
어쩌면 이런 소소한 행복이 프리랜서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번역 프리랜서는 스무 살 때부터 꿈이었다. 진짜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혹시 지금 다른 길을 걷더라도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직업을 꿈꿔왔다면 이만한 장점이 또 없지 아니하겠는가?
-건강을 잃는다. 잃더라도 되찾을 수 있을 때 되찾으세요.
프리랜서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영양제를 사서 드세요. 청광 차단 안경을 사서 쓰세요.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으세요." 정도이다.
온종일 앉아서 일하는 환경, 불규칙한 생활은 건강에도 치명적이며 운동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근손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자잘한 병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나는 자리잡기에 급급해서 건강 그게 뭔가요? 하면서 지냈다. 원체 운동을 싫어해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나마 띄엄띄엄 다니던 필라테스도 완전히 그만두었고, 빠르고 간편한 배달음식을 달고 살았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어느 날 갑자기 크게 아파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중도에 하차하고 미리 받아 둔 일감도 모두 캔슬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쳤다. (다행히 일을 캔슬할 때 사정을 설명해서 건강을 회복한 후에 일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그때 '한순간에 훅 간다'는 말을 실감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매일 조금씩 걷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체력은 바닥을 찍고 있다. 그리고 체력이 없으면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너무 너~무 힘드니 미리 체력을 조금씩 길러두길 바란다.
두 번째로 불안정한 수입을 들 수 있다.
나는 2018년부터 조금씩 번역일을 알아보고 번역회사에 이력서를 돌렸는데, 당시의 번역 수입은 세 달에 만원을 벌 때도 있었고, 한 달에 10만 원을 벌기도 하는 등 정말 들쭉날쭉했다. 다행히 2019년 7월 경부터 수입이 서서히 안정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안정되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2020년 1월에 큰 프로젝트가 겹친 덕에 프리랜서가 된 후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지만, 2월에 들어서자 일감이 많이 줄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입이 적거나 없는 달이 있을 수 있으므로 멘털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비상금이 항상 필요하다.
프리랜서는 잘 정착만 한다면 직장인보다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리랜서의 단점에서 언급한 건강과 돈이 인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감당해야 할 리스크 또한 크다. 모쪼록 오랫동안 건강하게 많이 버는 번역가가 되고 싶고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