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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Aug 21. 2017

떠돌이 한 시절 공동체

숙소의 재발견


"아, 그래도 한 여름 문턱을 넘은 것 같아"


꽤 서늘해진 바람 안에서 누군가와 만날 때마다 인사로 건네는 한 마디.

여름 하면 해수욕인데 올해는 남들보다 휴가를 일찍 다녀온 탓에 정작 '한 여름'휴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와 넘편은 뭔가 아쉬운 마음에 서둘러 연차를 내고, 동해 바다로 떠났다.


강릉 초당에 들러 초당순두부 한 사발을 들이켜고 찾아간 곳은 안목해변.

확실히 휴가 끝물에 비까지 내려 그런가, 우리가 생각한 만큼 사람이 바글거리진 않았다.

비가 그친 틈을 타 모래 위에 돗자리를 펴고, 우리는 파도소리 자장가 삼아 낮잠을 청했다.


누워있으면 보이는 것들.

이렇게 바깥에 누워있으면 천장 대신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다. 날씨에 따라 회색부터 파랑까지 다양한 색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이날은 채도가 낮은 회색과 흰색 사이의 하늘. 눈을 감으면 철썩 거리는 파도소리가 내 귀에,  눈을 뜨면 심심한 하늘이 내 코앞에 닿아 있었다.




"에이, 가면 다 있겠지 뭐."


무슨 배짱인지 몰라도 역시나 이번에도 우리는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았다.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일은 뭐랄까,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부터 발목을 잡히는 느낌이랄까. 여행 중 이 도시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전제로 여겨진달까.

그래서 나는 여행할 때 숙소를 미리 잡지 않는다. 이르게 해봐야 전날, 혹은 당일 날 오전에 잡는다.

나와는 정 반대의 성격인 우리 넘편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겄지 뭐."라며 기꺼이 나를 따라준다(라기 보단 사실 포기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강릉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되어서야 오늘 밤 묵을 곳을 찾았고 예약을 완료했다.






그렇게 극적으로(?) 오늘 밤 우리가 누울 곳이 정해졌다. 우리가 그동안 묵어온 숙소 스타일을 나누자면,


1.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찐덕한 공간. 밤이면 술 한 잔이 있는 잔치를 벌이고, 낮에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색한 인연이 있는 곳

2. 밖에서 놀만큼 놀고 돌아와도 아쉽지 않은 공간.(물론 아주 좋은 호텔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적당한 퀄리티일 경우) 넘편과 오붓하게 깔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인연이라고는 리셉션에 계시는 분들과의 간단한 통성명 정도



이번엔 1번 무드다.

그렇게 찾은 강릉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감자려인숙이>

에어비앤비에서 찾고, 다이렉트로 예약했다. 이유는 무려 20퍼센트가량의 에어비앤비 수수료가 빠질 뿐 아니라, 주인에게도 바로 입금을 하는 구조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기 때문.



사진에서 본 것만큼 실제로도 매우 히피 한 공간이었다. 나도 게스트하우스를 꽤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주인의 취향이 명확히 드러나는 곳도 드문 것 같다.

여기저기 붙은 엽서와 그림, 글을 보니 여기 주인은 여행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품 하나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독립 영화 포스터도 간간이 보인다.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차별 없는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계없이, 이윤보다 인간을.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이 이 집은 '업사이클링(Upcycling)'된 소품이 많다는 점이다. 폐원목을 거치대나 선반으로 고쳐 사용하거나, 큰 원형통 위에 방석을 얹어 의자로, 오래된 청바지를 잘라 바닥에 깔거나 널찍한 스카프를 벽에 걸어 포인트 인테리어로 활용하는 등 구석구석 버려질 뻔하다가 '다시 태어난'것들 투성이었다.


여담이지만, 아쉽게도 이날 우리가 생각하던 찐덕한 잔치의 밤을 보낼 수 없었다.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그나마 이날 밤 다른 방에 묵은 이들은 새벽녘에 들어온 바람에.

그치만 우리는 집 앞 평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묵은 방. 파아란 벽과 하얀 천장이 아름다운 곳. 소품과 색상 때문인지 히말라야 산속에 있을 법한 느낌의 아늑한 공간. 이날 입은 빨간 원피스를 옷걸이에 걸다가 히말라야에 입고 가는 상상 때문에 피식.


바닷가와 우리가 묵는 방의 경계는 허름한 콘크리트 벽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습기와 소음 때문에 포근한 하룻밤을 보내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다.



떠돌이 한 시절 공동체
 소규모게스트하우스 프로젝트

떠나기 직전, 밤새 이 집을 밝힌 간판등을 다시 천천히 쳐다보았다.

측면에 적힌 '떠돌이 한 시절 공동체'라는 말이 낯선 듯 익숙했다. 그래, 우리는 어쩌면 '한 시절'을 살아가는 '떠돌이'에 불과할지도 몰라. 이런 이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그게 삶인 거지. 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행도 마찬가지다. 값비싸고 번지르르한 숙소가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하루만(길어봐야 며칠) 묵을 건데. 여행자의 하루를 위하자고, 산을 깎고 바다를 메꿔 올리는 건물을 떠올려 본다. 여행자의 피로를 풀자고 현지인의 피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먼 바다나 산을 찍을 때 뷰파인더에 꼭 걸쳐지는 네모나고 거대한 덩어리. 진짜 이곳을 즐기고 싶은 여행객이라면 어쩌면 덜어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이런 덜어낼 것을 의식해서인지 이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그림자(실제 예명도 그렇게 사용하시는 듯)처럼, 보이지 않는다. 최소의 정리만 하고 사라지는 듯하다. 도착해서 주인인지, 다른 분인지 여하튼 어떤 분이 전하는 당부와 소개도 정말 짧았다. '그냥 보이는 대로 사용하면 되고, 밤늦게 도착하면 간혹 앞문이 잠길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이쪽으로 돌아오시라'는 게 전부였다.


숙소도 숙소지만, 한편으론 언젠가 나도 이렇게 내 취향이 드러나는 공간이 갖고 싶어 졌다. 어느 누가 와도 아 이 집 주인은 이런 걸 좋아하고, 추구하는구나. 이런 걸 말하고 싶었구나 하는. 번지르르하지 않고 소박한, 그리고 정다운 손길이 느껴지는 그런 공간을 말이다.

언젠가 나와 넘편을 포근히 안아줄 그 공간을 기다려 본다.



다녀와서 이 곳의 특이한 이름에 대해 찾아보니, 나름 심오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냥 '감자를 좋아하는 여인, 숙이'인 줄 알았네.


감자 려인, 숙이 (떠돌이 한 시절 공동체)

感者旅人, 宿移
감자感者 마음을 움직이기를 꿈꾸는 예술가와
려인旅人 떠돌며 여행하는 나그네와 여행자들이
숙이宿移 쉽고 편하게 묵어갈 수 있는 곳  




번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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