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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Sep 08. 2017

조각난 기억 맞추기

13년 전 찍은 필름을 현상하다


"이건 10년 전에 단종된 필름이에요."

"어머, 그래요?"

"네, 그래서 색감이나 질이 떨어지는 건

감안하셔야 해요. 일주일 뒤에 나와요."



10년을 기다리는 일주일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 사이 이번 달 마감도 무탈하게 해냈고, 날은 제법 선선해졌다. 넘편의 배는 그새를 못 참고 더 불룩 나온 듯하고, 환절기에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의 몸 상태는 나빠졌다. 급기야 나는 체질 개선과 체중 감량을 이유로 단식 기간을 갖기로 했다. 여전히 사람을 만났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필름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순간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오래된 대과거 경우에는 손을 쓸 수 없다 생각하는지(뭐 언제는 시간 브레이키를 잡은 적이나 있나) 미련 없이 훌훌 털어 보내기도 한다. 바로 이때, 기록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리고 기록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사람, 기억, 문자, 음악, 냄새, 사진 등 제멋대로 뒤엉킨 조각을 이어 붙이면 어느 한순간이 되고, 그 순간을 모아 촘촘히 나열하면 그게 인생인 것도 같다.

사실 이번에 현상한 열 개 중 일곱 개의 필름은 '기억을 위한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들이다. 좋아 죽겠다며 기껏 셔터를 눌러놓고는 행복마저 줄 세운다는 인생의 고단함. 


변명을 좀 하자면 5~6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 혹은 반 백수였던 나는 한 롤에 칠팔천 원이나 하는 현상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디지털카메라의 폭발적인 수요로 인천에 남아있던 현상소가 하나 둘 없어지면서 남은 단골 현상소 마저 현상 기계를 처분했다. 그래도 이어지는 발길에 주인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맡겨진 필름을 서울 현상소로 보내고, 다시 받아오면서 중간 단계가 생기는 통에 현상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서울에 가는 것도 어렵고, 성질이 급했던 나는 꾸역꾸역 그 집에 필름을 맡겼는데, 가진 모든 필름을 현상하기엔 찌질한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렇게 기억의(행복한 순간의) 줄이 세워진 것이다. 남은 필름은 그후로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남양주 어느 가정집 서랍 속에서 빛 하나 보지 못하고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다행히 최근 3~4년 동안에는 값이 싼 현상소를 발견했지만, 그렇다한들 예전만큼 사진을 찍지 않으니 필름을 맡기는 건 이제 연중행사가 되어버렸다.



의외의 기록

고백하건대, 기다리는 일주일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했지만, 사실 틈이 날 때마다 메일함을 열어보기 바빴다. 생각보다 현상 작업 속도가 빨라져서 하루라도 일찍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는 금물, 정확히 일주일만에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두근두근 떨리는 손끝으로 메일을 열고 압축 파일을 풀어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의외의 순간이 기록돼 있었다. 가장 오래된 필름이 대략 10년 전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히는 13년 전의 기록이 담겨있었다. 조각조각 흩어져 제 모습을 찾지 못했던 기억의 퍼즐이 맞춰졌다. 이 퍼즐은 스무 살 여름 방학에 친구와 떠난 삼 주간의 남해일주로 완성됐다. 그리고 다양한 순간을 함께 한 사람과 풍경도 있었다. 비록 흘러버린 시간만큼 바랜 색과 고르지 않은 입자, 어설픈 구도가 아쉽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견뎌 주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게다가 이 덕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도 연락이 닿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Nikon FM2를 갖게 된 건, 내 생애 몇 안 되는 고마운 물욕(物慾)이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말하는 삶의 정의는 늘 옳다. 단 하나의 순간이 전체가 되는 삶, 전체는 다시 한 순간으로. 인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 명료한 것일 지도,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은 삶 전체를 이룰 단 하나의 순간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 보르헤스 [알레프] 中












사실 정확히 어느 순간인지 헷갈리는 사진이 있어서 그냥 조각조각 끼워 맞추어 봤어요. 생각해보니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간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 잖아요.

더 많은 사진과 이야기는 차차 풀어봐요.



글과 사진 | 오가닉씨  

Nikon FM2 ⓒ2004~2016 오가닉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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