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몰린 숨을 여러 번에 걸쳐 길게 나누어 쉬었다.
이 무거운 숨소리를 '한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졌다.
이 돌덩이를 차마 '아픔'이라는 형용 정도로 남기고 싶지 않다.
탁심 광장으로부터 어딘가로 뻗은 순수박물관으로 가는 길.
소설 제목 때문이 아니라, 박물관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길 위에서 뜨겁고도 순수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케말은 대체 어쩌다 퓌순의 물건 하나하나를 소유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를 집착(소설 속에선 '사랑')하게 됐을까. 오랜 시간 동안 그녀 주변을 서성이며 그녀가 쓰던 소금통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 이유가 뭘까. 열 손가락을 백 번이나 더 넘기고 넘겨 천 단위의 하루를 세는 그가 했던 사랑은 정말 '순수'한 걸까.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케말의 마지막 말에 그런 그를 곁에 둔 퓌순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
37년 전 화창한 봄, 그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교과서에 실린 그날의 정식 명칭과 몇 줄의 설명글, 성인이 되어서 그날 그즈음에나 접한 기사 몇 개가 전부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부끄럽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유혈이 낭자한 그 도로 위에 차마 뜨거워 차고 넘치는 순수한 마음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과거의 한 조각일 거라고, 그렇게 치면 우리도 그런 조각의 삶 일부를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군홧발에 짓이겨진 얼굴과 심장,
억울한 검은 숨.
순수해서 더 고통스럽다.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줄 그늘막과 간단한 음식, 작은 스피커, 책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나들이 가는 길.
군인을 만났고, 구의역을 지났다. 엊그제는 광화문 광장을 마주 보고 올라 회사로 향했다. 이틀 뒤면 쌀값을 제값으로 받아야 한다는 어느 어르신이 거리에서 죽은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휴대전화를 들어보니 꽃다운 나이에 차가운 물 속에서 잊혀져간 어느 여고생의 이별식이 진행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세상은 나아졌다지만 아직인가보다.
도처에 널린 슬픔
가을바람이 살랑이는 푸르른 잔디 위에는 수많은 사랑 고백이 오갔을 거다.
사랑하는 이와 혹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은 너른 마당에 지금은 따뜻하고 순수한, 뜨거운 사랑 말고는 없다.
그늘막 속 나와 당신은 태평하게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라도 닿을 수만 있다면 고통으로 거칠어진 그 뺨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던 나는 부디 악몽만은 말아달라 기도했다.
머리맡엔 다 읽고도 차마 마지막 장을 넘기지 못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놓여 있다.
억울하게 세상을 등진 그대들이여,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