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조각들을 바라보기
얼마전에 두산갤러리의 <We Go> 전시회를 다녀왔다.
2024.3.20~4.20 이었는데 나는 마지막날 가서 일찍 못 온 것이 아쉬웠던 전시!
일단 전시장에 들어가면 전시장을 둘러싼 조각들이 벽에 붙어있다.
큐레이터가 써준 해설 핸드아웃을 나눠주는데, 조금 인용을 해보면
" 이때의 '우리(We)'는 조각을 둘러싼 여러 주체를 포함하며, '움직임(Go)'은 조각이 담보하는 여러 종류의 운동성을 지시한다. 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시간 이동과 거리 조정이 필요하다."
" 권현빈은 자신의 조각이 물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안내한 길을 좇아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라 여긴다. 돌을 주재료로 다루는 그는 돌의 누수 지점을 찾는다. (...) 시간의 적층이 뒤엉킨 돌에 이 같은 조각적 행위를 가한다는 것의 의미는 완결로 도달하는 게 아닌 계속해서 작아지며, 틈새를 통해 나아가는 상태를 예고한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처음에 한 덩어리였던 과거, 그리고 그 연한 부분 틈새로 깨어져버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갈라짐을 허락하는 부분으로 또 깨어지는 조각적인 행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각형 전시장에 쭉 늘어서있는 조각들
대부분 납작하게 누워있는데, 어떤 조각들은 얇은 면을 바닥으로 해서 튀어나와있는 조각들도 있었다. 누워있는 조각들의 나열에서 돌출된 조각들은 리듬감을 주는 것 처럼 느껴졌다.
보면서 이걸 어떻게 붙였을까 싶고.. 어떤 모양이었을까 싶고..
또 각자의 조각은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하고...
이렇게 일부만 사각형으로 칠해진 조각도 있었고
돌의 질감이 잘 보이는 조각, 그리고 조각 안에 또 조각이 되어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러한 조각들은 울퉁불퉁한 돌 틈새로 색을 채워 오히려 깊숙이 숨어있던 그 틈새의 모양이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그 흔적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칠해진 조각들은 그 나름의 조각으로서 존재한다. 아마 하나의 돌이었다면 그냥 '돌' 이나 큰 다른 조각의 일부로 인식됐겠지만 약한 부분을 따라 깨어지면서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약한 부분'이라는 것이 이 전시에서는 절대 나쁜 의미로 느껴지지 않아서 신기했다. 나는 늘 나의 '약한 부분'이 싫었고 고쳐야한다고 여겼지만, 여기서는 '약한 부분' '갈라지기를 허락하는 부분' 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새로운 조각 작품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나의 약한 면도 오히려 귀중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생각난 시가 있었다.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작가의 조각들은 한 때 큰 덩어리였지만 이제는 조각나고 그 나름의 모양과 표면의 무늬를 가지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는 조각들처럼..
하나하나 똑같은 조각이 하나도 없고,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각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며 작품앞에 서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전시. 고요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