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만난 칼 융의 심리학
내가 나 자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내가 되었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어려운 일은 어른이 되는 일이다. 신체적·사회적 과업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정신적 성숙과 정서적 균형을 갖추고 지혜가 몸에 밴 어른이 되는 일은 훨씬 더 힘겹고 고단하다.
사회에서 만난 많은 ‘어른’들은 대개 반면교사가 되었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라는 사회적 역량은 갖추었으나 인격적 결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정에서도 부모를 성숙한 어른으로 접하지 못한 나는, 수도 없이 어른을 찾아 헤맸다. 그 방황 속에서 만난 것이 바로 칼 융의 심리학이었다.
융은 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과 답을 던져주었다. 마흔에 다시 만난 그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유년기의 상처를 용기 있게 직면하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건강한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을 비추어주고 있다.
책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모들은 대개 자식들에게 역할과 과업은 가르치지만, 가치와 의미는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어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비극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심리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내는 것과 잘 사는 것
중년의 우울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새롭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힘이 솟아오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칼 융은 우울을 ‘정신이 던지는 질문’이라 보았다.
“지금 나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삶이 태어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요즈음 나는 삶의 가혹함에 배신당한 느낌이다.
사회적으로는 안정된 직업인, 부모, 이웃의 동료라는 역할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돌아보면 나도 어른이 아니고 내 주변에도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중년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고, 지치지만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실존적 존재가 아닌 생존을 위한 작은 책임만 작동할 뿐이다..
모든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가지만, 열심히 일할수록 업무는 늘어나고
내 휴식 시간은 각종 제안과 요청들에 잠식당한다. 몸은 지쳐가고, 마음은 점점 메말라간다.
진흙수저로 출발해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많이 벌수록 오히려 늘어나는 부담과 책임은 역설적으로 나를 더 짓누른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열심히 살아내는 것과 잘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조차 낯선 이방인
아주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조차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스스로를 표현할 권리, 자신을 드러낼 허가를 받았다는 느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허가는 누구도 대신 주지 않는다. 성인은 이 허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한때는 상냥함이나 협동심, 친절이 미덕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에 이르면, 그것들은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
어린 시절에는 적응을 위해 순응적 반사 행동이 필요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매일 정직성을 희생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런 행동은 과연 ‘좋은 행동’일까?
당신의 습관이나 일상, 늘 품어왔던 기대가 방해받을 때를 떠올려 보라.
그 순간 찾아오는 짜증과 불안은 곧 자아의 위기를 드러낸다.
현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직관적 감각을 통해 드러나며, 영혼이 의미와 유기적 전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인이다.
이때 영혼의 요구는 자아의식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출처: 마흔에 읽는 융 심리학_저자: 제임스 홀리스출판_ 21세기 북스발매(202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