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깨어남
어느 겨울날, 박에스더가 춘희에게 DJ DOC 콘서트를 가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티켓값은 더치페이였다. 박에스더는 춘희와 동행할 때 거의 100% 더치페이를 고집했다. 에스더의 차를 타는 경우를 제외하면, 계산은 또래 관계처럼 지독하게 정확했다.
춘희는 클래식 음악만 수십 년간 들어온 음악적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DJ DOC는 전혀 취향이 아니었다. 설령 에스더가 티켓을 사서 초대한다 해도 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춘희를 보며, 에스더는 5만 원짜리 티켓 하나도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느냐는 서운한 시선을 던졌다.
춘희는 3년째 에스더와 삶이 엉켜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과 자유가 필요했다. 주말을 혼자 보낼 권리가 있음에도, 에스더의 허덕이는 외로움과 처절한 공허감은 늘 춘희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춘희는 토요일 오전, 연세대학교 평생교육원 한 학기 피아노 레슨을 신청했다. 1차적 목표는 삶의 축을 되돌리는 것이었고, 동시에 에스더가 덜 서운해할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춘희가 스물한 살 연상 사업가와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교사는, 마을버스에 함께 출근하며 춘희에게 말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DJ DOC 콘서트를 거절한 뒤, 에스더는 전 세계 지점에서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상류층의 부산 요트 파티가 있다며 KTX를 타고 다녀오자고 했다. 스무 살대 프랑스 귀족 청년도 온다고 덧붙였다.
춘희는 더 이상 형편에 맞지 않는 이런 삶에서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
지난 연말, 에스더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우연히 방에 들어갔다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게 되었다. 평창동 대사관저에 살며 두 아들을 하버드와 옥스퍼드에 보낸 사모님이 청담동에 모델학원을 차렸고, 한 은행장과 주고받은 이메일이 열려 있었다.
내용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보이던 그 사모님이 자금 문제로 은행장을 협박하는 메일이었다.
“아. 내가 꿈꾸던 삶을 향유하는 저 사람의 마음은 지금 지옥이구나. 가진 것이 전부는 아니구나.”
춘희는 그 순간 환상에서 깨어났다.
춘희는 대학 시절, 부전공은 클래식 피아노였다. 막 음악적 귀가 트이기 시작할 무렵 졸업을 했다. 예술적 표현에 목말라 있었고, 대학원에 진학해 깊이 공부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몇백만 원의 등록금을 들여 학부 때 전공한 연극을 또다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은 달랐다. 경희가 매달 요구하는 생활비 50만 원, 오피스텔 월세와 관리비, 식료품을 제외하면 5만 원짜리 에센스 한 개를 살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공부도 제대로 못 한 채, 적성에 맞지 않는 교직 생활에 에너지를 소진하며 앞날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춘희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내면화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만 살자. 내 젊음이 아깝다.”
도살장에 끌려가듯 반복되는 직장생활 속에서, 정작 나를 위해 쓸 돈은 없었다. 애초에 삶에 큰 미련도 없었다.
서른에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춘희는 결혼에 대한 기대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생애주기 과제를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에서 만난 상사 김사랑 부장님은 춘희를 많이 아꼈다. 사랑은 경희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사랑은 “엄마가 다 결혼할 때 주려고 적금 들어 모아둘 거야.”라고 말했다.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하지만 경희는 생활비가 입금되는 날, 아주 들뜬 목소리로 춘희에게 전화를 걸어 종종 말했다.
“너 덕분에 내가 외할머니한테 효도한다.”
“네가 준 돈으로 백화점 가서 아빠 옷 샀어.”
춘희는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어차피 준 돈이다. 어떻게 쓰든 생각하지 말자. “
20년 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경희는 춘희에게 말했다.
“네가 외할머니를 위해 한 게 뭐 있냐?”
하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춘희의 외할머니는 춘희의 이름조차 ‘춘이’로 기억했다.
모성애를 발현하기보다, 에스트로겐을 다량 방출하며 여자로서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춘희는 외할머니의 따뜻한 밥상이나 시선을 느껴본 적이 없다. 즉, 외할머니와 혈육의 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