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버린 지난날

2부

by 글쟁이 오리

군 복무를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약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 먼저 찾은 곳은 아버지가 사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동네도 다른 곳에 혼자 살 새집을 구하셨다. 이 집에 사춘기 내 마음을 더 어지럽혔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이다. 한 달쯤 뒤에 같이 살려고 하는데, 엄마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의지하면서…”

“엄마가 아니잖아요. 엄마가 아닌데 어떻게 엄마처럼 생각하라는 거야!”

그땐 어떻게 엄마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로 멋들어진 사랑은 아니지만, 대학에 들어가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떠나고 10년 만에 처음 데려온 사람이었다. 10년이나 누나와 나를 홀로 키우시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한 아버지를 위한 선택. 어린 내가 충분히 불편했을 상황은 맞지만, 아버지를 미워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는 걸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집엔 예전처럼 아줌마한테서 나는 이상한 향수 냄새도 방문 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TV 소리도 없다. 남은 건 빼빼 마른 아버지와 쿰쿰한 냄새, 내가 온다고 급히 치워둔 듯한 어색한 컵과 옷가지뿐. 하지만 지나간 일들을 묻지 않았다,

“군대는 더 이상 못 미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입대가 언제라고?”

그날 밤 우리는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젊은 날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밝게 빛났다. 짠- 건배를 하고 한 잔 마시면 눈이 반짝. 또 짠- 하고 나면 눈이 반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들어갔던 일, 대학 시험에 떨어져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길가에서 잠이 든 일, 첫 직장 같은 것들.

“아버지는 젊었던 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누구든 그럴 거다.”

“왜요?”

“이제 아니까. 그때가 좋았던걸.”

“그럼….”

“그럼, 다시 돌아가도 엄마랑 결혼할 거예요? 이혼할 걸 알아도 말이에요.”

아버지가 술 한 잔을 드시곤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네가 부럽다.”

돌아온 건 엉뚱한 대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젊음이 그렇고, 해준 게 없는데도 힘든 일 다 이겨내고 혼자 잘 살아가는 네 모습이, 내 아들이지만 본받아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다. 질투라 생각해도 좋아.”

아버지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들에게 느끼는 질투라…, 이상하게 들릴진 몰라도 그렇게 느끼는 날이 있었다. 젊은 네가 부럽고, 젊은 내가 그리울 때가 있어.”

“젊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야, 나는 반드시 네 엄마를 다시 만나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느낌은 경험해 볼 수 없을 테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절망스럽고 앞이 깜깜한 순간에도 너와 지영이는 항상 함께였다. 너희가 없었다면 내 삶은 달랐을 거야. 그래… 정말 무료했을 거야.”

이 말을 들으며, 나도 누나도 없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래, 무료하셨을 거야.


아버지는 내가 독일로 떠나기 전 타던 차를 그대로 타고 다니셨다. 입소식 날, 아버지는 이른 새벽 일어나 준비하시곤, 낡고 익숙한 향이 나는 그 차에 나를 태워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훈련소 근처에서 함께 식사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려서 별말을 나누지 못했다.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다른 가족들이 포옹과 눈물을 나눌 때, 아버지와 나는 술잔을 기울이던 어떤 밤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다.”

아버지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나는 놀라 아버지의 옆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말에 한국을 떠나던 날 공항에서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해내지 못했던 기억.

“사랑한다.”

“네….”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나는 내 힘듦이 더 중해서 아버지의 말에 짧은 대답 하나 남기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는 날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오늘처럼 먼 곳을 바라봤을까, 멀어지는 내 등만 끝까지 바라봤을까, 내가 뒤돌아 손 흔들 때를 기다리면서.

그때 바람이 불었다. 훈련소 앞에 불던 바람과 아버지의 뺨에 핀 검버섯과 하얀 눈썹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다른 가족들처럼 나를 세게 껴안으셨다.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울음을 참느라 목이 욱신거렸다. 아버지가 거칠거칠한 손으로 내게 봉투를 하나 툭툭 쥐여주셨다. 편지 봉투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다시 안았다.

“저도요, 사랑해요. 아빠, 잘 다녀올게요.”

아버지는 다시 무료할 것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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