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의료사고를 겪다.
보리가 아주 어릴 때 잠복고환이라는 진단을 받아 제거 수술을 받았었다. 그런데 8살이 된 보리의 몸에서 다시 고환이 발견되었고, 보리는 다시 수술대에 누워 전신마취를 하고 다시 배를 열어 고환을 제거했다. 과거 보리를 수술했던 의사에게 설명을 해달라 요구했으나 그는 기억도 기록도 남아있는 게 없다며 되려 이제 와서 왜 난리냐 큰소리쳤다. 며칠간 우리 가족들의 마음은 지옥이었고, 보리는 많이 아팠다.
엄마의 무릎 위에 늘어진 보리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1년 전 보리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던 날, 나는 몹시 무력했었다. 슬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가만히 손 놓고 있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보리가 어떤 존재냐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세상에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믿음’이라고. 보리는 퇴근길에 1000원짜리 인형 하나만 사 가지고 들어가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보리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나는 이 아이 앞에서 유일하게 계산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는 이 세상이 여전히 살아갈만하다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2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처음으로 보리를 위해 많은 것을 각오했다. 나 몰라라 하는 수의사와 싸우기 위해 변호사 자문을 구해 가며 동물 의료사고 판례를 찾고, 수의학 논문을 뒤지고, 미국에 있는 수의사에게 메일까지 쓰는 미친 짓까지 벌였다. 물론 사나흘만에 수의사가 실수를 인정하며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나,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는 처음으로 빈발 월경까지 겪으며 며칠간 많이 앓았다.
이제는 ‘네가 옳았다.’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해주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지인들이 나를 뜯어말렸다. 동물 의료사고는 여전히 동물법이 제대로 제정되지 않아 그냥 사물로 취급되어 배상도 미미하고 승소할 확률도 매우 낮다고 한다. 과연 사과 한마디 듣자고 돈, 시간, 스트레스를 다 감수하고 피 튀기며 싸우는 게 정말 보리를 위한 길이 맞나 무한히 의심스러웠고, 몹시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다시 모든 고통을 보리 혼자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였다.
보리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보리의 남은 생을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살다가는 것이다. 그래 준다면, 나는 소중한 이 아이 앞에서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