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버스나 지하철 줄을 서다 보면 꼭 마주치는 무법자들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버스를 탈 때에도 서너 명의 어르신들이 줄 서있는 나를 밀어내고 먼저 버스에 올랐다. 한 분은 위험하게 차도로 내려가 줄의 맨 앞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순간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법 추워진 날씨에 언 손을 비벼가며 줄 서있는 사람들이 바본 줄 아세요? 하는 말을 목 끝에 달랑거리지만 이내 눌러낸다.
모두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알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모든 어르신들이 다 새치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왜 새치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연령대가 그러한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앉아서 가고 싶어서겠지. 앉아서 가는 것이 새치기라는 몰상식과 무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인 거겠지. 그럼 왜 그렇게까지 앉아야만 하는가.
아파서겠지. 노쇠한 관절이 더 이상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서 견디기 어려워서겠지.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약자석은 버스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지하철에서는 그 수가 매우 적다. 울컥 올라온 화 앞에 잠시 측은함이 드리웠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오르는 나는 대부분 피곤하다. 출근하거나, 퇴근하거나, 구두를 신기도 하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르신을 마주쳐도 자리를 양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정말로 몸이 너무 고단하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일말의 가책이 한 층, 한 층 쌓였던 모양이다.
요새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어른들을 보면, 유튜브 방송에서 우연히 보게 된 지상렬 님의 건배사가 떠오른다.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무법을 정당화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세대를 거쳐간 노쇠한 그들과, 치열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나, 우리들 사이의 지난한 갈등에는 결국 서로에 대한 연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새치기는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