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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니 May 01. 2021

나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한 놈은이미 죽었는지도 몰라.





이번 주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며 겨우겨우 주중을 버티다, 어제는 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 해가 뜨는 것을 보고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젯밤에 나를 갉아먹은 지겨운 고민에 대해 맥락 없는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이 만하면 됐다, 나쁜 일만 없으면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에 나쁜 일은 없을 수 없었고, 여전히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나는, 괜찮을 수 없었다. 여전히 건강해지지 않았고, 여전히 불행했다. 잠시 체감할 수 있는 갈등이 없었을 뿐, 작은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어제 혼자 침대에 누워서 쓸데없는 상상으로 엉엉 울다가 생각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불행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욕심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감추기만 하다가는, 영영 행복하게 사는 것에서 멀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 가.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문제가 있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오늘은 내가 그토록 감추려고 한 나의 미운점을 좀 꺼내보려고 한다.




출처: https://www.news-medical.net/health/Insomnia-Causes.aspx




나는 흐트러지는 모습에 대한 강박이 있다.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는 망가지는 게, 아니 실은 다 망가졌는데,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무섭다. ‘쟤 알고 보니까,’ 혹은 ‘쟤 저런 애였어?’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겁이 난다. 회피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이런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이런 미운점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더 이상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귀찮거나, 성가신 이유가 아니다. 망가진 내 모습을 보여줄 자신도, 수년 동안 망가져 온 과정을 설명할 시간도, 말재간도 없다. 이해시키는 건 왠지 이기적인 거 같고, 이해했다는 말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다. 그게 애인이건, 친구건, 동료이건, 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에 아주 서툴렀고, 결국은 상대방에게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나보냈다. 옹벽은 점점 높고 두꺼워졌다.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결국에는 내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라 내 모습을 들킨 사람들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살을 비비며 살다 보니 나의 가정사를 꽤나 속속들이 인지하게 된, 그래서 자신들의 가정사도 조금씩 털어놓아준 친구들 몇 명, 그리고 주민등록증만 어른이 되고 여전히 아이였던, 그래서 무한히 깨지고 부서졌던 대학생활을 함께한 친구 한 명, 그렇게 친구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마지막 친구는 늘 ‘문 닫고 들어온 친구’로 불리는데, 그걸 꽤 자랑스러워하는 거 같기도 하다.) 남자 친구들도 그랬다. 나는 한 번도 나를 열어준 적이 없으며, 그를 열어주지도 않았다. 그게 얼마나 괴로웠을까 미안하기도 하면서, 나는 내가 너무 지독하다.





출처: https://ppss.kr/archives/199869




결국 그 강박이 내 진짜 모습을 방구석에 가둔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꺼내놓고, 방구석에 갇힌 진짜 나는 썩어간다. 


현관문 안의 나와 밖의 내가, 혹은 마음과 머리가, 혹은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나와 숨고 싶은 내가 타협점을 찾아야 할 텐데, 나는 그 중간을 찾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지금 와서야 생각해보니 어쩌면 한 놈은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죽었나. 정말 죽어버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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