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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니 Mar 24. 2021

나는 운이 좋았지

'긍정'보다는겸손하고, '감사'보다는 합리적인



노래 하나에 꽂히면 그 노래를 닳도록 듣는 편인데, 닳도록 들은 노래를 20곡쯤 추리면 꼭 들어가는 노래가 있다. 권진아의 '운이 좋았지'.






나는 운이 좋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 파렴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꽤나 보탬이 되는 말이다. 물론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보다는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말보다는 합리적이어서 좋다. 



1. (어쩌면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You'라는 말이 '너'라는 말이라는 것을 이미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알려진 세상에 태어나서 운이 참 좋다. 'Love'라는 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한 세상에 태어났다면, 한자를 외워야했을 거니까.


2. 특출나게 예쁘고 잘생긴 건 아니지만, 웃는 얼굴은 호감형이라 운이 좋았다.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의 입에서 ‘네가 웃을 때 나도 같이 행복해져.’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태어난 건 축복이다.


3. 머리가 나빠서 기억력도 안 좋고,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나를 이해시키고 나면 남을 조금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다.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만, 한번 이해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쉬운 말로 설명해줄 수 있게 된다. 난 정말 멍청한 데도 불구하고, 내가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참 행운이다.


4. 우주가 무너질 것처럼 좌절해봤지만, 다시 일어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 다시 괜찮아진 경험이 없었다면, 이 절망이 얼마나 길어졌을 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5. 그 남자를 다시 만나서 정말 많이 후회했지만, 과거의 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어 그것도 운이 좋았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미화를 되풀이하며 미련을 싹 틔웠을 것이다.



불행한 순간들을 비집고 나오면서 나는 많이 아파졌고, 닳았고, 지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처럼 운이 좋았다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한다.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가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 시간을 흘려보냈으며, 옳건 옳지 않건 단단한 기준을 세웠을 테니,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늘 되뇌인다. 그게 힘없는 ‘다 잘될거야.’라는 말보다 내게는 힘이 되는 거 같다.



나는 운이 좋았지. 내 삶에서 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내게 불었던 바람들 중에 너는 가장 큰 폭풍이었기에 그 많던 비바람과 다가올 눈보라도 이제는 봄바람이 됐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나는 아직 누군가를 뜨겁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본 경험이 없으나) 인생을 살아가며 겪을 그 수많은 폭풍과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내고, 다가올 봄바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운 좋은 어른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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