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0 Mon
부끄럽게도 20일 만에 적어 내려가는 일기장이 참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맥주 한 캔에 여행의 피로를 씻어 내리며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조금 끄적여보려고 한다. 이번 교환학생 생활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를 꼽자면 나는 이번 발렌시아 여행을 꼽지 않을까 싶다. 낯섦에 대한 공포, 기댈 곳이 없다는 위태로움, 그리고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없다는 권태로움으로 참 어렵고 힘겨운 날들의 끝에서 애써 버텨왔던 내가 처음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이제는 모든 일에 무미건조해져 버린 나를 조금 달래며 오래전부터 열망해온 중고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서 떠난 여행길은 정말 피곤했고, 지쳤고, 온몸이 쑤시고, 피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디 하나 모나지 않고 참 착한 사람들과, 참 근사한 풍경과, 따뜻한 날씨와, 푸른 나무와 바다와 하늘과 꽃과 구름과 달과 별이 대단히 감동적이었던 여행이라 나는 너무 많이 위로받았다. 그동안 나는 너무 외로웠다고.
여행지에서 첫 생리가 터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리고 불평불만으로 입이 댓 발 튀어나와있었을 텐데, 새하얀 이불보에 묻은 새빨간 피가, 조금은 긴장을 놓고 마음을 열게 된 나의 마음 같아서, 이불빨래를 하는 나의 손은 내심 기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