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특강
독립서점 구경 다니는 취미가 생긴 이후로 꽤 오랫동안 대형 서점에 발길을 끊다가 오늘 계획에 없던 대형 서점에 가게 됐다. 부자가 되는 10가지 습관, 주식왕 되는 법을 지나니 그 크나큰 서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바로 문제집 코너였다.
와, 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길 참 밥먹듯이 왔었지. 나 그때 정말 열심히 살았지.
아직 주름잡기 너무 어리석은 나이지만, 가끔 시간의 유속이 소름 끼치게 빠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게 수학의 정석 앞에서 일 줄이야. 웃기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이십몇 년 동안 선생님도 되어보고, 종업원도 되어보고, 사원도 되어보고, 선임도 되어보고, 꽤 다양한 것들이 되어봤지만, 학생만큼 내 마음을 철없고 건강하게 만드는 자아가 없다. 그래서 내 이름 앞에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떼던 순간, 나는 몹시 아쉽고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하루 문제집을 푼 장수만큼 자기 만족감을 주고, 숫자가 주는 축복과 절망을 동시에 받으며, 십 년 뒤 내가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은 상상력으로 꿈을 꾸던, 나는 그때를 늘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그리움이 잊힐 만큼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학기 초 빤질빤질한 새 교과서에 이름을 곱게 적어 내려가던 설렘도, 학기 말 너덜너덜해진 교과서를 보며 느끼던 희열도, 그 고만고만한 것들에 소박한 기쁨과 슬픔을 누리던 그날로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출근길, 차창 너머로 교복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앞머리에 돌돌 구르프를 말고 우당탕탕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나 보다.
오늘 5200원 수능특강을 한 권 샀다. 계산대 앞에 줄 서있는 내내, 저 이모는 뭔데 저걸 사나 누가 궁금해하면 어떡하나 민망해 계산이 끝나자마자 가방 속에 욱여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책상 앞 포스트잇 가득 아자아자를 적어놓고 결의를 다지던 날로 오늘은 돌아간 것만 같다.
나에게 타임머신이 수능특강일 줄이야, 나무 책상 앞에 앉아있던 그때의 나는 행복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