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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파주 DMZ 지역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

군대 얘기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by 오로지오롯이



나는 군 복무 시절 파주 DMZ 인근에서 1년간 도라 OP와 GOP 철책 근무를 섰다. 이후 남은 기간은 임진각 평화누리 부근 일반 부대에서 보내고 전역했다. 그 당시 서울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아본 경험은 군대가 유일했기에, 지금도 이곳은 나에게 제2의 고향처럼 친근하다. 시간이 꽤 흘러 모든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군 보안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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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전망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현판이 있다.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 단순한 문구 같지만, 매번 그 앞에 설 때마다 묵직한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다. 당시 군 내부에서는 새로운 슬로건 공모전도 열렸지만, 끝내 저 문구만이 남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만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포상휴가를 꿈꾸며 여러 아이디어를 제출했지만, 내 문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시절의 작은 설렘은 지금도 선명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압도적이다. 왼편에는 개성공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북쪽에서 드물게 켜지는 불빛 덕에 그 존재감은 더욱 강렬했다. 깜깜한 땅 위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공단의 건물들은 마치 또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멀리 보이는 덕물산과 전봉산에서는 간혹 불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이는 북한군의 작전 수행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빛 하나에도 긴장이 감돌았지만, 한편으로는 DMZ만의 독특한 풍경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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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인근에는 북한의 212GP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GOP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진 곳으로, 육안이나 카메라로도 북한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매일의 일상처럼 이어졌지만, 동시에 DMZ만의 특별한 풍경과 공기가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송신탑은 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시설로 알려져 있었고, 김일성 동상은 크기만 해도 10m가 넘었다. 북한 전역에 3만 5천 개가 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데, 그 제작 비용이 주민들의 식량으로 쓰였다면 훨씬 많은 이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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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안에는 남과 북을 상징하는 두 마을이 있다. 우리 측에는 대성동 마을이 있고, 북측에는 기정동 마을이 있다. 대성동에는 지금도 50여 가구, 200여 명이 살아가고 있다. 기정동에는 100m가 넘는 인공기 철탑이 서 있는데, 남측의 태극기 철탑보다도 높다. 멀리서 바라본 그 깃발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분단의 현실을 실감하게 하는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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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삶은 단순히 군인으로서의 시간이 아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펼쳐지는 산세는 때로는 장엄했고, 때로는 포근했다. 동물원에서도 보기 힘든 야생동물이 불쑥 눈앞에 나타나곤 했으며, 그 풍경은 전역 후에도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혹독한 추위도 잊을 수 없다. 한겨울이면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몸서리가 쳐졌고, 그런 날씨 속에서도 경계근무를 서야 했던 시간은 지금 돌이켜봐도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한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그곳에서 겪은 모든 순간은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도 매일 마주한 자연,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느꼈던 묵직한 감정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기억이다.


파주 DMZ. 누군가에게는 그저 특별한 관광지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청춘의 한 조각이자 두 번째 고향이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이뤄지는 날, 그곳은 단절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공간으로 다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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