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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감상] 나무의 죽음, 박형서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박형서의 「나무의 죽음」은 세 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에 수록된 여덟 편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2006년 겨울부터 2010년 겨울 사이에 쓰인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으로, 「정류장」을 비롯해 「갈라파고스」, 「자정의 픽션」, 그리고 내가 특히 오래 붙잡아 읽은 「나무의 죽음」 등이 실려 있다.


이 소설집은 처음부터 ‘이야기의 힘’을 굳게 믿는 작가의 태도가 느껴진다. 화려한 실험이나 극단적인 서사 대신, 작가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가 가진 밀도와 파장을 천천히 밀어올리는 방식을 택한다. 어떤 작품은 민담처럼, 어떤 작품은 도시의 우화처럼, 또 어떤 작품은 몽환적인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모두 세계의 균열과 허상에 대한 작가의 냉정한 시선이 깔려 있다. 이 소설집을 읽는 일은 마치 잘 만들어진 손공예품을 만지는 일과 비슷하다. 처음엔 단순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한 결이 촘촘히 엮여 있다.



작품 스타일


박형서는 서사 자체의 쾌감을 신뢰하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일상에서 문명사적 스케일까지 스케일을 가리지 않는 상상력, 서늘한 유머, 이종의 지적 레퍼런스를 가볍게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감각이 자주 지목된다. 요컨대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순정한 허구 세계를 창조하는 실험적 서사자”라는 평이 대표적이다.


금세 몰입되는 이야기의 추진력이 강점이며, 장르적 장난과 윤리적 질문 사이를 오가는 이중 톤, 그리고 변신·설화·환상과 리얼리즘이 맞물리는 혼성적 문체가 특징이다. 이건 「나무의 죽음」의 민담적 외피와 현대적 결말이 공존하는 방식과도 정확히 맞물린다.




수록작 中 [나무의 죽음] 감상


민담의 가면으로 시작되는 세계


처음 몇 문장만 읽어도 옛이야기의 분위기가 짙다. 사또, 백발노인, 붉은 애송이, 삽 같은 소품이 등장하고, 인물의 말투는 자문자답이 잦다. 마치 “옛날 옛적에…”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는 단순한 분위기 장치가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장치로 민담의 리듬을 빌려온다. 독자가 “이건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느낄 때쯤, 이야기는 이미 설화의 껍질을 쓰고 현대의 질문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에서 민담의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독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교훈이 주어질 것처럼 정돈되던 서사가 공허와 질문만을 남기고 끝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설화적 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친숙함으로 유도하고, 낯섦으로 마무리한다.



단순한 사건, 세밀한 긴장


이야기의 핵심은 ‘백발노인’과 ‘붉은 애송이’의 논쟁이다. 겉보기엔 사소한 다툼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이 대립을 단순한 설교나 교훈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삽, 둑, 강, 산 같은 오브제와 공간의 묘사가 치밀하게 얽혀 있어, 단순한 논쟁이 작은 긴장감으로 지속적으로 팽팽하게 유지된다.


이 긴장감은 거대한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터지지 않는 사소함과 정지감이 긴장을 만든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추진력으로 독자를 끌고 가는 대신, 공간과 사물의 배치, 인물 간의 미묘한 거리감으로 긴장을 서서히 조여간다.



변화의 얼굴과 가림의 그림자


작품의 표층 주제는 단순하다. 시간은 어떤 풍경을 덮고, 또 다른 풍경이 그것을 대신한다. 산이 강을 가리고, 강이 산을 지우는 식이다. 표면적으로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질문은 더 깊다. 우리가 발전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세우는 일은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이 단순하고 냉정한 사실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다.


작품의 삽은 이 변화의 촉매이자 상징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단순한 도구 중 하나인 삽이, 풍경의 얼굴을 바꾸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둑 하나가 무너지고 나서 풍경이 송두리째 달라진다는 문장은 그 단순함만큼이나 섬뜩하다.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쉽게 바뀌는가를 보여주는 짧고도 날카로운 장면이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의 충격


가장 인상 깊은 문장들은 모두 ‘없음’을 말한다.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게 아닐까.” “고향에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환상.” 이런 문장들이 쌓이며 이야기는 논쟁의 문제를 넘어서 세계의 실체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간다.


작가는 교묘하게 서사를 전개한다. 처음에는 산과 강이라는 실재하는 풍경을 놓고 말다툼을 벌이던 인물들이, 끝에 이르러서는 그 풍경의 실체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지점에 이른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는 세계의 ‘모양’이 얼마나 덧없고 가벼운지, 그 위태로움이 피부로 전해진다.



언어와 환상의 공모


두 인물의 논쟁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환상을 정당화하는 절차처럼 보인다. 말이 길어질수록 진실은 또렷해지지 않고, 점점 더 흐려진다. 작가는 이 점을 교묘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가려서 보기 좋게 만드는 장치일 수도 있다.


결국 소설이 남기는 것은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논쟁의 무력감이다. 말은 세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세계는 말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무너진다.



사라짐이라는 이름의 세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사라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상실의 감정이 아니다. 사라짐을 통해 드러나는 건, 우리가 실재라고 믿어온 세계가 애초에 환상일 수도 있었다는 섬뜩한 가능성이다. 그 환상이 걷히고 난 자리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풍경도, 둑도, 고향도, 심지어 논쟁의 의미조차도.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떤 교훈이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침묵을 건넨다.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깊은 “그것이 정말 있었는가?”라는 질문.



흔들림으로서의 이야기


나는 이 작품을 읽고 한동안 ‘작은 둑 하나’라는 문장을 곱씹었다. 우리의 세계는 거대한 변화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작은 균열 하나로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은 거대한 서사나 감정의 폭발 없이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민담처럼 부드럽게 시작해 사라짐의 공허로 끝나는 흔들림의 소설이다. 이 흔들림은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각자가 자기 안의 무언가를 다시 묻도록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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