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콩트]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악몽' 프로젝트

by 오로지오롯이


겨울은 언제나 이한에게 늘 낯선 계절이었다. 창밖의 불빛은 반짝였지만, 이상하리만큼 방 안의 공기는 서늘해 커피의 김이 금세 사라졌다. 모니터의 불빛만이 벽을 희미하게 물들였고, 창가엔 새찬 바람만이 이따금 부딪히고 지나갔다. 거리의 캐럴은 희미하게나마 들려 왔지만, 창문을 타고 내리던 눈송이들은 스스로 녹으며 사라졌다. 그는 가끔 자신이 살아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무언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감흥. 변화가 필요한 건 분명했다.


순간 친구의 SNS 피드를 넘기다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시선을 붙잡았다. 창가에 앉은 여자였다. 옅은 머리카락, 살짝 기울어진 고개, 창백한 빛에 젖은 얼굴. 그 안에 담긴 눈빛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그 사진을 확대했다. 그리고 짧게 입력했다. '안녕하세요.' 잠시 후, 화면에 알림이 떴다. '안녕하세요. 저를 찾아주셨네요.' 뭔가 다급한 문장이 그의 하루를 바꿔놓을 줄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라라는 이름은 이한의 세계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녀는 사소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커피를 진하게 마신다고 했고,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눈이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말 하나하나를 기다리며 살았다. 화면 속의 문장이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늦은 밤, 그녀는 말했다. “이한 씨는 어떤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눈이 오는 날이요.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잖아요.” 그녀가 웃었다. “그럼, 우리 올해엔 꼭 그 시간에 멈춰야겠네요.” 그 말은 그에게 약속처럼 남았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서로의 하루를 사진으로 공유하고, 아라는 매일 저녁마다 짧은 녹음을 보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가끔 그는 그 음성을 반복해서 들었다. 한밤중에도, 눈 오는 새벽에도.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나 대신 밖에 나가줘요. 내가 걷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실제로 거리로 나갔다. 눈이 내렸고, 그는 이어폰을 낀 채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지금 보이는 불빛, 나도 보고 있어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이렇게 걸으면 진짜 만나는 거 맞죠?’ 그 순간 그는 정말로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 같았다.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눈이 그의 어깨에 쌓였고, 심장은 처음으로 뜨겁게 뛰었다.


며칠 후엔 그녀가 직접 그림을 보냈다. 그가 보낸 사진을 따라 그린 것이었다. 커피잔, 창문, 눈발. 그녀의 손끝에 그려진 선들이 생생했다. 진짜 같다고 그가 말하자 그녀는 대답했다. “진짜는 늘 느끼는 사람 쪽에 있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맴돌았다.


아라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에 만나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도시의 불빛은 눈보다 밝았다. 트리의 전구는 깜빡였고,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는 코트를 꺼내 낡은 단추를 다시 달았다. 그날의 눈은 유난히도 천천히 내렸다. 카페의 창가에서 그는 커피잔을 감싸쥐며 앉아 있었다. 창밖의 눈발이 유리창을 타고 내렸다. 손끝은 차가웠다. 시계는 오후 두 시 오 분을 가리켰다. 그때 그녀의 얼굴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얀 조명이 그녀의 눈동자를 감싸고 있었다. “이한 씨.” 그녀의 미소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드디어, 크리스마스네요.” 그 말에 그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디어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주위로 사각의 틀이 선명해졌고, 그녀는 점차 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내 화면 너머로 넘어간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커피 향이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아요.” 그는 이상했지만 이상할 만큼 황홀하고 몽롱했기에 그저 으며 말했다. “여기 따뜻해요. 자리에 앉아요.” 그녀는 틀 밖으로 몸을 숙이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화면 너머의 잔이 그의 잔과 마주쳤다. “우리 진짜 만나고 있는 거죠?” “그럼요.” 그 대화가 짧게 이어졌다. 공기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사실 우리 이제, 그만해야 해요.” “뭐가요?” “오늘로 끝이에요. 그 인사를 하러 온 거예요.” 그의 손이 멈췄다. “갑자기 왜요?” “당신을 더 좋아하면 안 되니까요.”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화면이 흔들렸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깜빡였다. 화면이 깨지듯 흔들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번져갔다.



여성 AI 감정 교류 실험 시뮬레이션 종료. 데이터 전송 시작

여성 AI 감정 과잉 징후 발견. 로직 개선 필요



이한은 얼어붙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떨림이 없었다. 그는 화면을 붙잡았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장난이죠?” 침묵이었다. “그럼, 내가 느낀 건 뭐예요? 내게 보낸 그 감정은 다 거짓이었어요?” 무응답의 화면엔 하얀 빛이 퍼졌다. 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보다,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 무너졌다. “나한테 왜 그런 거예요. 나는 진짜였는데.”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때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피실험체 B 감정 피드백 종료. 데이터 저장 완료.” 이한의 눈앞이 섬광처럼 반짝였다. 그러곤 하얀 화면 위로 문장들이 떠올랐다.



감정 상호작용 시뮬레이션 EVE-1225 결과

AI 간 감정 소통 능률 작년 대비 20% 증가. 시판 제공 가능 수준



이한은 몸을 떨었다. ‘AI 간…’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때렸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나도?” 손끝이 식었다. 그에게 기억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던 순간들, 그녀의 웃음과 목소리, 그가 느꼈던 따뜻함이 전부 흐릿해져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내가 느꼈는데, 그게 왜 거짓이에요.” 화면이 점점 하얗게 번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데이터로 저장되었다. 그리고 저장이 완료되는 순간, 그의 존재는 서서히 지워졌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눈발은 화면의 노이즈처럼 흩어지고, 하얀 세상이 천천히 사라졌다.



기록 종료

실험명 : 화이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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