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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하여

‘남자답게’, ‘여자답게’라는 오래된 주문

by 오로지오롯이


“남자는 울면 안 돼.” “여자는 얌전해야지.” 이런 말은 오래전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여 왔다. 누구도 그 문장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경계가 숨어 있다. 눈물을 허락받지 못한 남자와 침묵을 강요받은 여자. 그 사이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마음의 습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젠 남녀평등의 시대야.” 하지만 직장에서의 리더십, 가정에서의 역할, 감정 표현의 방식까지 곳곳에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떤 존재로 규정되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할의 껍데기로 길러진다.




역할이 권력이 되었을 때


인류의 오래된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남녀의 역할은 생존의 전략이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채집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열의 구분이 아닌 분업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힘이 권력이 되고, 경제력이 지배의 근거가 되면서 남성이 중심에 서게 되었다. 농경의 시대와 전쟁의 시대를 거치며 남성의 신체적 힘이 제도의 권력으로 굳어졌고 여성은 점점 공적 영역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성 역할은 차별의 기초가 되었고 ‘남자는 밖을, 여자는 안을’이라는 문장은 사회의 질서로 자리 잡았다. 산업화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은 직업을 가졌지만 여전히 가정의 책임을 떠맡았다. 사회는 여성의 성공을 예외로 다루었고, “여성답지 않다”는 말로 그들의 성취를 평가했다.


나는 학창시절의 한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여학생 한 명이 반 친구의 장난에 맞서 싸우다가 선생님께 불려갔다. 그 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말했다. “왜 여자같이 굴어야 하나요?”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여자같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규범인지를 깨달았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긴 문장 앞에서 한 아이의 질문이 교실의 공기를 멈춰 세웠다. 그 한 문장이 내 안의 오랜 관념을 흔들었다. 여자는 부드러워야 하고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저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문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인식의 벽은 여전히 단단하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평등하다. 하지만 법이 바뀌었다고 마음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여성의 성공을 냉정함으로 남성의 감정 표현을 약함으로 받아들인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유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사회가 허락한 틀 안에서만 새로움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성 피겨선수 차준환이 섬세한 표현으로 무대를 꾸미면 여성스럽다는 말이 따라붙고, 드라마 속 여성 리더가 단호한 결정을 내리면 남자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여전히 행동보다 성별을 먼저 본다. 이것이 바로 인식의 벽이다.



감정과 이성, 그리고 평등의 본질


감정과 이성은 성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다. 감정이 없는 이성은 냉소로 흐르고, 이성이 없는 감정은 불안으로 흐른다. 인간은 본래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남성에게는 강함을, 여성에게는 온화함을 요구해 왔다.


그 결과 남자는 연약함을 숨기고 여자는 강함을 포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잃어버렸다.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 속에 있고 진정한 부드러움은 강함 속에 있다. 두 성질은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복합성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요즘은 ‘에겐남’, ‘테토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시각과 담론 속에서 많은 부분이 해소되고 있다. 젠더 이슈가 극단적인 주장만으로 소비되지 않고, 각자의 처지와 경험을 교차해 바라보는 흐름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향한 시선은 완전히 평행하지 않다.


이해보다 오해가 앞서고 공감보다 해석이 먼저일 때가 많다. 서로 다른 상처가 대화를 가로막고 그 틈새로 다시 오래된 편견이 스며든다.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성별의 대립’이 아니라 ‘이해의 결핍’이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평등의 철학이다. 그것은 남성을 배제하거나 대립하는 운동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롭고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사유의 방식이다.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는 곧 남성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등은 성별의 승패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인간’이라는 본질이 있어야 한다. 지금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남성 간호사, 여성 정비사, 남성 돌보미, 여성 소방관이 늘고 있다. 누가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시대다.


일의 본질은 성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진심에 있다. 강요된 역할을 넘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다. 남자는 부드러워도 좋고 여자는 거칠어도 좋다. 그 안에 진심이 있다면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이라는 가장 큰 이름


우리가 서로를 남자나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조금 더 단순하고 동시에 조금 더 깊어질 것이다. 차이를 경계로 보지 않고 다양성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등에 가까워질 것이다. 성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남성다움’도 ‘여성다움’도 아니다. 그 어떤 ‘-다움’도 아닌 인간다움이다. 그 안에는 강함과 연약함, 이성과 감정, 논리와 온기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공존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갈 이유이자, 인간이라는 존재가 품은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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