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현실의 틈에서
귀농을 생각하게 된 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충동이 아니었다. 짧지 않은 회사 생활 속에서 단조로움이 몸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나는 지나가는 계절을 조금 더 온전히 느끼기 위해 퇴근 후마다 주말농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5년 넘게 작은 밭을 가꾸다 보니 땅은 어느새 내 안의 조용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고추가 가지를 벌릴 때의 힘, 상추가 비에 젖어 고개를 숙일 때의 약한 떨림, 한낮의 흙에서 미세하게 올라오던 열기 같은 것들. 그런 감각들이 서서히 쌓이면서, 언젠가는 이 루틴으로 더 길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니라 오래 묵혀둔 씨앗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일에 가까웠다.
귀촌정착 프로그램 숙소에 처음 들어섰던 밤,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평온했다. 도시의 침묵이 불안을 데려온다면, 이곳의 적막은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다. 무겁기는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함께 프로그램을 듣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시골로 흘러들어온 이들이었고, 서로의 사연을 나누다 보면 이상할 만큼 금세 가까워졌다. 나보다 먼저 귀농을 시작한 청년들은 느리지만 확실한 몸짓으로 농사의 기본을 알려주었다. 그들의 손등에는 햇빛과 바람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나는 그 손을 보며 농사라는 것이 단순히 땅을 일구는 일이 아니라 삶의 온도를 그 손에 얹는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온기 덕분에 매일을 버틸 수 있었다. 이 길이 나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때도, 그 온기는 불안을 조금씩 덜어냈다.
그 무렵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듯 만나는 사람마다 귀농할 거라고 말했다. 말해버린 약속은 쉽게 꺾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상이 흔들릴 때마다, 현실이 조금씩 자리를 빼앗아갈 때마다 이미 흘려보낸 말이 나를 다시 붙잡았다. 어느 날은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처럼 느껴졌고, 다른 날은 허리를 조용히 떠받치는 힘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스마트팜 교육이 눈에 들어왔다. 이 분야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IT 일을 하며 손끝으로 다루던 기술이 흙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주말농장에서 직접 땅을 만질 때의 감각이 기술과 섞이면 어떤 새로운 장면이 열릴지 궁금했다. 스마트팜은 두 세계가 서로를 기대며 서 있는 장소였다. 기숙사에 머물며 기술을 배우던 시간은 낯설지 않았다. 센서에서 흘러나오는 숫자들은 오래 보아온 언어였고, 작물의 생장이 그 숫자를 밀고 당기는 흐름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기술이라는 말이 주는 매끄러운 표면과 달리, 현장은 늘 작은 균열을 품고 있었다. 기계는 예고 없이 멈추고, 센서 값은 바람 한 번에도 흔들렸다. 작물은 늘 자신만의 속도로 자랐고, 기술은 그 뒤를 따라가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귀촌 프로그램에서 배운 흙의 고집스러움과 스마트팜에서 마주한 기술의 한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연은 인간이 그리는 계획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 앞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섰고, 그 멈춤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무렵, 글이 다시 나를 불렀다. 마음이 복잡한 날이면 노트북을 열어 그날의 장면들을 적었다. 비닐하우스 천장에 쌓여 있던 습기, 환기창 사이로 스쳐 지나가던 바람, 실패한 날의 조용한 허탈함 같은 것들.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글쓰기는 내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또 다른 꿈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처럼, 다시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은 꿈이기도 했다.
1년이 지나 도시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귀농을 곧바로 이어가기엔 준비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실패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 시간은 내가 꿈꿨던 이상향이 나와 직접 대면하고, 나를 흔들고 다시 세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덕분에 글을 조금씩 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브런치를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읽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다시 뿌리를 내리는 일과도 같았다.
지금 나는 상상과 현실이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상상은 언제나 조금 더 앞서 있고, 현실은 제 속도로 움직이거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틈은 한때 나를 불안하게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새로운 길을 비추는 창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틈 속에서 흔들렸고, 흔들리며 다시 일어섰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주말농장에서 땅을 밟으며,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며,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그리고 그 모든 흔들림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담담하게 지켜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