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내가 빚은 건 술이었을까

술 빚기는 기다림을 정제하는 일

by 오로지오롯이



포천에 있는 배상면주가에서 조주 체험을 했다. 술을 배우러 갔다고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확히는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지를 배웠다. 이 체험의 중심에는 기술보다 태도가 있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언제 손을 떼느냐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때 이 나라에서는 집에서 술을 빚는 일이 금지되었다. 가양주는 불법이었고, 술은 허가된 공간에서만 태어날 수 있었다. 1995년에야 그 금지가 풀렸지만, 사라졌던 풍경이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집에 술이 있었고, 그 술에는 각자의 계절과 노동의 리듬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술은 기호품이기 전에 생활의 일부였고, 시간을 보내는 방식 그 자체였다. 술의 금지는 어쩌면, 집 안에서 시간이 천천히 발효되던 감각의 중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막걸리에서 약주와 소주가 모두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설명은 이 체험의 핵심을 관통했다. 출발점은 같지만,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덜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술이 된다. 같은 재료, 같은 조건. 다른 결말. 술은 끝까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인간은 다만, 어느 지점에서 물러설지를 결정할 뿐이다. 그 이후의 시간은 술이 스스로 감당한다.


조주 체험이 끝난 뒤에는 시음이 이어졌다. 막 만들어진 술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전통주를 함께 맛보았다. 지역마다 술의 성격은 분명히 달랐다. 어떤 술은 거칠었고, 어떤 술은 지나치게 맑았다. 쌀의 품종, 물의 성질, 기후와 저장 방식이 맛을 갈라놓았다. 술을 통해 지역을 배운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을 옮길 때마다 풍경이 바뀌는 느낌이었다.


양조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쌀과 누룩, 물이 놓여 있었고, 설명은 절제되어 있었다. 더 넣으라는 말보다, 지금은 그대로 두라는 말이 많았다. 발효는 인간의 개입으로 시작되지만, 인간의 의지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술은 노력의 총합이라기보다, 개입과 비개입이 정확히 구분된 결과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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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누룩만 있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도전 가능할 듯



완성된 술병에 이름을 쓰고, 일주일을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술병을 소중히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 따듯한 방 안쪽에 고이 두었다. 한 켠에 놓인 병은 생각보다 자주 눈에 들어왔다. 괜히 확인해보고 싶었고, 괜히 흔들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손을 거두었다.


일주일 뒤, 술을 열었다. 완성이라는 말보다는 도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향, 다소 불안정한 맛. 그럼에도 분명히 시간이 지나온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내가 개입하지 않은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다림, 방치, 그리고 믿음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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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숙성 후 위에 있는 깨끗한 것만 떠내면 약주가 되며, 막걸리는 아래 부분과 물을 섞는다. (기호 따라 설탕이나 사이다 첨가)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쪽으로 천천히 길들여져 왔다. 시간이 걸린다는 말 앞에서 먼저 마음이 조급해지고, 과정은 가능한 한 접어두고 싶어진다. 오래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들은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채 지나가곤 한다.


하지만 술은 끝까지 시간을 요구한다. 서두른다고 빨라지지 않고, 재촉한다고 앞당겨지지 않는다. 다만 제 속도로 가겠다고, 조용히 고집할 뿐이다. 손을 대지 않는 시간이 쌓이고, 그 시간이 맛이 된다. 술은 그렇게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구간을 품은 채 완성된다.


술을 빚는다는 건 어쩌면 기다림을 정제하는 일이다.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손길을 덜어내는 일. 결과를 그리되, 그 결과를 온전히 소유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태도. 발효는 인간과 미생물이 함께 만드는 과정이고, 그 협업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따른다. 그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이 술의 깊이가 된다.


그날 내가 마신 것은 술이었지만,
내 안에 남은 것은 오래도록 가만히 두었던 시간의 감각이었다.




KakaoTalk_20251231_083323117_04.jpg 새콤한 막걸리와 매콤한 제육으로 훌륭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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