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신년 다짐
나는 오랜 시간 IT 기획자로 살았다. 무언가를 정의하고, 구조로 만들고, 이름 붙이는 일이 업이었다. 정의되지 않은 것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구조로 묶이지 않은 생각은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서비스에는 늘 명사가 필요했고, 기능은 반드시 주어가 되어야 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분명해야 했고, 애매한 것들은 정리되거나 밀려나거나 조용히 사라졌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 역시 하나의 명사처럼 굳어갔다. 역할로 불리고, 설명으로 존재하는 사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을 때만 안심이 되는 상태였다. 대답이 가능한 동안은 괜찮았지만, 문득 그 대답이 사라졌을 때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기획자로서의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말해지지 않는 감각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속도가 맞지 않는 생각들, 쓸모없어 보이는 문장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 같은 것들이 그때마다 정리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것들이 사라지는 쪽에 오래 서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정리에서 한 발쯤 물러서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필명이 필요해졌을 때, 그래서 명사를 피하고 싶었다. 나를 가리키는 이름보다, 문장을 가만히 뒤에서 받쳐주는 말이 필요했다. 앞에 서지 않고, 주장하지 않고, 방향만 아주 조금 바꿔주는 말.
오로지.
오롯이.
둘 다 혼자서는 설 수 없는 말이다. 주체가 될 수 없고, 무언가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행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조용히 꾸며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남느냐에 더 가까운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질문 속에서 살아왔다. 기획자, 책임자, 결정하는 사람. 그 질문에 답하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그 질문이 정말 나를 설명하는지는 자주 잊곤 했다. 이 필명은 그 질문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2026년이라는 숫자를 떠올리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달력으로는 분명 이번 해인데, 마음으로는 아직 손이 닿지 않는 시간 같다. 나는 오랫동안 미래를 계획하는 일을 해왔지만, 올해만큼은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올해는 무언가를 증명하는 해가 아니었으면 한다.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설명이 없어도 괜찮고,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도 괜찮은 해. 다만 돌아보았을 때, 그 시간을 버텨낸 몸의 감각만은 남아 있는 해였으면 좋겠다.
글도 마찬가지다. 빨리 쓰지 않아도 되고, 자주 쓰지 않아도 되고, 잘 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대신 한 문장을 쓰더라도 그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쓰는 해. 생각보다 오래 머뭇거리고, 필요 이상으로 고치고, 끝내 지우지 못한 문장들이 남아 있어도 괜찮은 해.
어쩌면 나는 여전히 기획자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모든 일들 옆에 글이 조용히 놓여 있기를 바란다. 중심이 아니라 곁으로, 성과가 아니라 기록으로.
그래서 나는 이 이름으로 글을 쓴다. 선언처럼 보이지 않게, 다짐에 가깝게. 오로지 쓰겠다고, 오롯이 남기겠다고. 쉽게 묽어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방향을 잃지 않는 어떤 온기를 남기겠다고.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었던 시간. 아마도 2026년은 그런 해로 남을 것이다.
오로지, 오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