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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비종교인의 성서 다시 보기

by 오로지오롯이


종교인이 비종교인에게 성서를 읽으라고 한다면, 성서란 무엇이고,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라 넌지시 던져줘야 할 것이다. <성서 다시 보기>는 그런 점에서 충분한 만족을 주었다고 생각이 든다. 필자가 물론 미션 스쿨, 오산 고등학교를 졸업하여서 한경직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조만식 선생의 업적을 느끼며 고등학교 생활을 했더라도 성서에 관한 거리감은 줄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말했다. 글을 쓰는 일로 살아갈 너에게는 성경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종교인으로서 성경을 보지 않아도 좋다. 글을 쓰기 위한 삶에는 성경은 많은 깨우침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난 중립의 선을 지킬 것이다. 기독교인과 불교인, 그 밖의 모든 종교인, 비종교인을 아우를 수 있는 글을 쓸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나만의 영역에서 여러 시선으로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겉이 아닌 그들의 속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성서 다시 보기>는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라는 개념은 bible을 뜻함을 미리 알려둔다. 사실 성서라는 말은 불분명하기 때문에-다른 종교의 성서들도 존재하기에-다른 종교와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기독교의 힘이 크다고 해서 ‘성서’가 바이블만을 뜻할 수는 없기에 기독교만의 성서를 뜻하는 개념을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전을 보면 ‘성서’는 다른 종교의 성서들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 보편적으로 성서는 바이블을 뜻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인이라면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열심히 읽고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나가고, 전도를 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삶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 뜻을 널리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필자가 느낀 것과 같이 비종교인에게도 성서의 개념은 중요하다. 책의 머리말에서는 이렇게 필자를 이해시키고 있다.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이지만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서 우리 모두가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은 읽어 보아야 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성서는 인류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 글귀에서 내가 주목하는 구절은 인류 역사 발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말이다. 후자 쪽이 내가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좀 더 적합할 것 같고, 내가 글을 쓰기 위한 목적과 같기 때문이다.


이미 성서의 큰 의미는 역사와 함께 흐르면서 증명되었다고 믿는다. 성서는 무엇인가.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역사적으로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그 시대를 비판하는 도구로서도 사용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성서가 넌지시 던져주는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정신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였는지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많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해도 기독교가 없었다면 우리는 쉽게 사랑과 인간에 대해 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념들을 정리하는 동안에 성서가 무엇이고,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책의 내용에 더욱 주목하여 이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성서 다시 보기>에서 가장 먼저 논하는 것은 종교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내용은 이혁배 교수님 수업 시간 때 다루었던 이야기라 정리하는 식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는 수업 시간 때부터 이 주제에 대하여 생각이 많았다. 일단 주제 자체도 흥미롭고, 의미 있었지만, 내가 종교 경험에 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종교 경험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고, 나의 감성과 큰 연결이 있었다. 또한 종교 경험 후에 큰 자기 변화가 있었다.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고, 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며, 사후와 전생의 세계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내 종교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히 나 혼자서 간직할 테지만, 종교 경험의 힘은 정말 강렬하고도, 의미가 있는 듯하다.


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을 정리해 두었다. 그중 내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성서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내가 생각한 부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 부분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혜와 구원이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사 속에서 지혜와 구원은 항상 필요한 것이었던 것처럼 현대에도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여러 사람의 지혜와 구원이 필요하다. 예수의 존재라는 것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또 다른 예수의 삶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예수의 영향력은 거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surrender: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
salvation: 온 인류를 위해 구원을 이루심
service: 섬김의 정신을 구현함


이 부분이 가장 와 닿았던 것 같다. 우리 모둔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시고, 인류를 위하여 대신 벌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 나타나신 예수의 존재를 생각할 때면 전 세계에는 예수만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 같다. 사실 예수의 삶이 종교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이 세상이 싫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에 언제나 악이 존재하고, 선이 존재한다면 선의 대표자로서 예수만큼의 지도자가 항상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예수가 신도 되고, 인간도 된다면 신의 능력은 제쳐두더라도 인간의 참된 모습 정도는 본받아 실천하는 삶이 옳다고 믿으며,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존재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항상 예수를 막연히 동경하는 것도 예수 자체의 존재가 참 매력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악의 문제에 대해서도 책은 설명하고 있는데, 심도 있게 읽은 부분이었다. 신정론에 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종교 시간에도 약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종교 수업에 관하여 불만이 있던 한 학우가(이 시기에 종교 문제 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았었다.) 이리 말했던 적이 있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점점 늘었는데, 왜 세상은 점점 악해지는가. 난 그때도 지금도 그 학생의 말에 공감을 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악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여일 뿐이라고 악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하지만 내가 본 세상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본 세상은 선이 악의 결여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믿을 것이다.


선하지 않은 사람을 악하다고 보지는 않으나, 악하지 않은 사람은 선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에 길가에 술 취한 사람이 차가운 길바닥에서 자고 있다고 치자. 많은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갈 것이다. 하지만 그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물론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에 의한 것, 즉 종교적인 잣대로 보면 그 행동은 분명 악한 것이나, 내가 말한 것은 일단 종교 밖의 시선이다. 반대로 길가에서 걸어가다가 지갑을 떨어뜨린 앞 사람에게 지갑을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악하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선한 인간이라고 치켜세운다. 물론 단편적인 예로 선과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위의 예가 적절하다고도 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은 점점 악해져서인지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악하게 보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 선하게 본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정신, 곧 종교의 의미로 보면 착한 사마리가 되지 못하는 많은 인간들은 악한 존재들인데, 그렇다면 세상의 악의 존재를 종교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단지 믿음의 문제로 치우치기에는 예수가 세상을 위해 한 일들이 너무나 위대하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세상의 악의 문제를 선의 결여로 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으로는 세상의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나는 평소 레비나스의 이론을 종교적인 해석을 배제한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었다.(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이론은 철저하게 종교와 이어진 것임을 알고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윤리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 보면 레비나스는 무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대로 지정 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것을 레비나스가 말한 현현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가 우리에게 정의로움을 요구하고 명령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고 그 요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닫는 순간 반응을 하게 되고, 자신이 정의롭지 못한다는 것에 속죄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주체가 되고, 진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위한 삶, 즉 타자를 위한 윤리적, 책임적 존재로 나아가는 삶이 진정 악하지 않아 선한 것이라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악의 문제는 정말 복잡해서 더 이상 정리가 되지 않을 듯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예수를 종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인격의 본보기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종교로서 본다면 전체적인 의미가 되고, 기독교가 말하는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인 개개인의 부족함으로 본다면, 이 악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각자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이 되는 듯싶다. 물론 후자의 입장이 된다면 종교의 의미는 축소되겠지만, 종교라는 것은 개인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 중 가장 영향력이 큰 도구가 아닌가 싶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이유에 대하여 서술한 부분도 주의 깊게 보았다. 책에서는 예수가 온 이유를


타락한 세살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고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을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고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라고 축소하여 받아들였지만,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의 전재는 이 세상이 타락했고, 타락한 죄인들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전재를 통해 생각해 보면 일단은 예수의 존재와 기독교의 탄생이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느낀다.


기독교의 존재는 항상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대신에 사후 세계에 관한 보상을 제시한다. 이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두려움인 죽음을 극복하는 대신에 깨끗한 삶, 즉 타락하지 않은 삶으로 인도해준다. 나는 그것에 통하여 종교의 매력을 느끼곤 한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타락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종교의 분쟁은 기독교가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기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덜 타락하고, 타락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읽을 때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종교 시간에 본 일이 있는데, 예수의 죽음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감동한 때가 아닌가 싶다. 정말 예수가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죽었는지 아닌지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마음으로 죽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지금 다시 그 영상을 떠올려보니 괜히 다시 가슴이 떨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적힌 부분에서는 셰익스피어가 등장한 구절이 재밌게 다가왔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이 방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방에 들어오신다면 우리는 모두 꿇어 엎드려
그의 옷자락에 입 맞출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을 이용하여 내 입장으로 셰익스피어와 예수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만일 예수가 내 방에 들어온다면 나는 일어나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내 방에 들어오신다면 나는 그의 저서를 꺼내 품에 안으며 항상 당신을 안고 있었다고 말해 줄 것이다-라고 쓰게 될 것이다. 내가 더 열렬히 환영하는 존재는 아마 셰익스피어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물론 훗날에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수가 준 것보다 셰익스피어가 준 가르침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내가 바이블을 읽어보려 하는 것도 예수가 내게 얼마나 큰, 얼마나 의미 있는 가르침을 줄까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장 인간은 누구인가-에서는 인간의 정의가 나오는데 그 관련 텍스트 중에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오늘날처럼 심각하게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는 그 구절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의 꿈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쓰는 것인데, 그 인간과 세상은 내가 사는 이 시점이 될 것이고, 이 시점의 인간과 세상은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모든 종교들과 긴밀하게 연계된 것이기 때문에 바이블을 비롯한 모든 종교의 성서에 대하여 큰 관심을 불어 일으키게 되었다.


책의 이 부분에서는 인간의 정의를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는데, 역시나 가장 눈길이 가는 정의는 인간이 바로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심성에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종교성은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가장 문제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그 종교성의 방향에 따라서 문제의식도 달라진다. 현대는 소비와 욕망의 종교성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고,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어진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와 종교는 빈번히 마주한다. 교회는 큰 간판을 켜고, 거대한 교회당 안에 신도들을 효율적으로 집어넣는다. 신도들은 자신의 금력을 과시하며 십일조를 낸다. 그 과정에서 이미 성스러움은 느껴보기 어렵다. 교회의 성스러움은 자본에 의하여 때가 탈 수밖에 없고, 인간은 성스러움과 속됨(돈) 사이에서 속됨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성스러움을 포기하게 되고, 현대의 종교성은 속됨과 결합된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종교에 대한 종교성 안에서도 욕망을 향한 종교성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본성 중에 종교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지만, 현대 종교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과 큰 관련이 없는 것 같기에 이쯤 마무리하려 한다.


신약 성서 부분을 읽을 때는 앞부분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었다. 신약 성서는 내가 읽지 못한 바이블의 내용이기 때문에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필요한 부분을 따로 적어가면서 읽었다. 정리한 부분과 그 단상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걸쳐 기록되었다. 신약성서의 단행본들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그리고 기타의 책들이 그것이다. 또한 복음서는 4권 단행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적으로 예수의 삶과 메시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며, 바울서신은 편지의 형식을 띤 13권의 단행본들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이라는 말은 유앙겔리온이란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인데, 따로 찾아보니 영어로 굿 뉴스라는 ‘기쁜 소식’을 뜻한 것이었다. 신약 성서가 어떤 식으로 기쁘게 다가올지 생각하면서 책을 마저 읽어 내렸다.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른 살 이전, 즉 사생애의 생활을 보낸 목수 일을 보낼 때와 서른 살부터 서른세 살까지 3년 동안 공식적인 삶을 산 공생애의 생활을 보냈다고 적혀 있었다. 책에서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전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해석하려고 노력했고 서술했다. 이것이 구약 성서와 어떤 차이를 띠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예수에 대해 깊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서는 공관복음서과 제 4복음서로 나뉠 수 있는데 공관복음서에 포함된 것 중에 마태복음 관련 부분을 자세히 보았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유대교의 특성을 많이 수용하였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은 새로 생긴 기독교가 그 모태가 되는 유대교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사실 유대교의 경전은 구약성서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 내가 마태복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역사적인 의미를 크게 생각하고, 현대에까지 끼치는 그들의 영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는 앞으로 독서를 통하여 유대인들에 관한 의미를 확장시킬 계획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부질없다고 느낀 것이 있는데, 이 책의 이름(성서 다시 보기)처럼 바이블을 먼저 접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데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거 같아서다. 마가복음이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이는 바이블을 읽지 않고, 이 구절을 읽어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도 바이블에 대해 조금 공부하는 편이 좋다는 판단 아래 책을 계속 정독하였다.


2장 교회와 선교에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해 소개되어 있는데 누가 복음은 예수의 활동에 관해 서술하고 있고, 사도들의 활동 혹은 그들에 의해 이끌어진 교회의 활동에 관해 보도하고 있다고 써 놓았다. 누가복음 부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관심을 잘 보여주는 복음서라는 점에서 관심 있게 읽었다. 글을 쓸 때의 자세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의 종교로서 존재하는 것을 떠나 그가 한 일이 진정 진실이든지 아니든지 내가 예수에게 관심 있어 하는 이유는 그 예수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 타자에 관한 애정, 이유 없는 이타심,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같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인 누가복음은 전 세계를 위한 메시지로, 예수는 만민을 위한 구세주로 이해되고 있는 만큼 바이블을 읽을 때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 볼 것 같다. 바이블을 탐독하는 내 계획은 어떻게든 진행이 될 것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끝없는 끈기가 필요하겠지만 요즘처럼 바이블에 큰 관심을 갖은 적이 없었던 만큼 이번을 큰 기회로 잡으려 한다.


바울서신 부분을 읽을 때는 왜 그토록 바울이 선교 활동을 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였다. 데살로니가 지방과 아가야 지방의 중심도시 고린도를 거쳐 소아시아의 에베소까지 갈 수 있을 때까지 가서 복음을 하는 그의 기록을 보면서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그토록 절실히 퍼트리려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또한 바이블을 읽으며 느껴야 할 대목인 듯싶다.


4장 공동서신과 묵시 문학 편에서는 역시나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요한계시록이 가장 흥미롭고 매력 있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예술과 미학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듯하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예전에 조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요한계시록은 볼 생각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하였다. 신자들의 박해와 환난을 위로하고 예수의 재림, 천국의 도래 등을 이야기한 요한계시록을 통해 종교적인 글을 흥미롭게 쓸 수 있는 발판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바이블을 읽을 때에 어떤 방향을 가지고 읽어야 할지 안내해 주는 듯싶다. 이 글에는 내가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와 그런 이유를 갖게 해주는 영역 위주로 이야기해 보았지만, 사실 내가 읽은 종교 관련 서적 중에는 꽤 꼼꼼히 읽은 책이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나서 드는 상념은 바이블을 읽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이 책은 바이블을 어느 정도 읽어가면서 참고하면 참 유용할 것 같다는 감상이다.


어떤 사람은 바이블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서 바이블을 읽다가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바이블을 공부한다는 생각에 꽤 큰 설렘이 다가온다. 이 책의 제목은 성서 다시 읽기지만, 성서를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의 의미가 어떠했는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책이 바이블을 읽겠다는 내 의지와 동기 부여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바이블을 읽어 보고 다시 이 책을 찾아본다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그때는 이 감상문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을까. 바뀔 내 모습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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