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마일] 감상
이 영화는 거작 쇼생크 탈출을 연출했던 프랭크 다라몬트가 연출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판타지적이면서도 휴머니즘을 간직한 영화라고 평가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많은 상징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플롯 또한 간단하지 않지만, 복잡하면서도 내용 있는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잘 맞물려 있다. 이는 감독의 연출 능력과 시나리오 구성의 완성도가 높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끌어내는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한 몫을 했다. 전반적인 평은 내리기 어려운 영화지만 플롯이 강하게 전달되고, 예상되면서도 빗나가는 간헐적인 반전과 내용 변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3시간이라는 긴 영화 상영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몰입을 돕게 해주는 그런 영화적 장치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고, 감정을 고조시키며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때부터 사형과 살인을 예측하고 소름 끼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노인이 된 폴을 보여준다. 영화의 다른 한 단면인 잔잔한 휴머니티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연출자와 시청자의 괴리를 통해 영화는 그 자체로 한 단계 더 의미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주인공인 폴이 60년 전인 1935년 루이지애나주 콜드마운틴 교도소 사형수 감방의 간수장을 지낼 때 일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던 중 존 커피라는 거인 흑인이 사형수로 들어오게 된다. 코피는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이 영화의 판타지 요소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실 교도소에 관련된 휴머니즘 영화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영화의 장르 집중도와 현실성을 흐트러지게 할 수 있으므로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 판타지적 극중 인물이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현실의 부조리와 인간 심리의 불예측성을 잘 설명해 준 듯싶다.
물론 판타지적 거부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혹은 보고 나서도 지속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픽션인 소설이란 장르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현실이 아닌 판타지가 보여주는 현실의 진실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가볍게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영화는 단순히 교도소 간수와 사형수의 우정 이야기로 치부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작품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였고, 큰 문제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사형 문제와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기독교적인 문제까지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사형을 반대한다는 메시지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사형 자체의 존폐보다는 사형으로 가기까지의 과정이 인종차별적이지 않고, 명백하길 바라는 모습이 더 많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사형수들은 모두 흑인이거나 소수 민족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재판 결과는 이 영화 속 진실처럼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존 커피는 무죄였고, 그 변호를 담당하는 사람조차 확증 없이 경험적인 판단으로만 그를 살인자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살해된 두 딸의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도 모두 백인이었으며, 존 커피의 진실을 들어보려는 시도가 없었다. 이는 이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인종문제가 겉으로 드러남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또 영화 속에서는 종교적인 논란거리가 될만한 장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존 커피의 사형 일자가 다가오면서 영화는 종교적인 색채로 영적인 의미를 집어넣고, 기적이라는 매체 속에 죄의식과 용서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존 커피의 존재를 보면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를 떠올리기 쉬웠을 것이다. 존 커피 또한 예수처럼 기적 후 죽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보아 예수의 재림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든다.
존 커피가 폴에게 울며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예수가 하나님에게 울며 기도한 것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할의 부인이 존 커피에게 성 크리스토퍼를 상징하는 목걸이를 걸어주었다는 장치까지 기독교적인 색채를 짙게 해 준다. 물론 이런 기독교적인 모습들이 해당 종교인과 비종교인들의 판단을 가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을 통해, 그런 종교적인 판타지를 통해 이 영화의 휴머니티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를 종교 영화가 아닌 휴머니즘 영화로 보는 시각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물론 종교적인 휴머니즘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 방식대로 해석해도 그만이다.
그린 마일은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걷는 길이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그린 마일은 있을 것이며,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 또한 그린 마일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걷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영화에는 상처 주는 사람들과 상처 받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상처를 위로하는 사람도 나온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그린 마일을 걸어야 할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감독은 마지막까지 그린 마일에 대한 사람들의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미스터 징글과 폴이 부여받은 생명력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 우리가 원하던 장수라는 개념을 뒤집는 시도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부여받은 시간 동안 욕심 없이 아름답게 만들어가라는 메시지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사형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린 마일을 언제 걸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그린 마일을 생각하기 이전에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만들고, 실다운 인생을 꾸려가는 것. 그것이 영화 그린 마일이 교도소 속 휴머니즘을 통해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