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들] 시퀀스 분석
분석할 거리가 많은 상징적 영화들을 찾아보니 사실상 분석이 안 된 영화는 없었다. 그래서 내 해석으로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선택한 시퀀스는 영화 <몽상가들>의 결말 부분이다. 이 영화의 결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인 68혁명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68년은 전 세계적으로 자유정신의 물꼬가 터진 시기이다. 락 그룹의 반항 정신이 흐르던 시기였으며 기존 영화 문법을 거부하고 영화계에 신선하고도 열정적인 에너지를 수혈한 누벨바그 영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존 권력에 대한 파괴와 전복 의식이 팽배했으며, 이러한 혁명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성 해방, 저항 운동이 야기된다.
전반적 캐릭터와 스토리
<몽상가들>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프랑스 태생의 쌍둥이 테오와 이사벨, 그리고 미국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온 매튜. 테오는 보수적인 아버지를 증오하며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가장 저항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이사벨은 테오와 아버지의 중간 입장으로, 그 누구의 편을 들지 않지만 나체로 매일 밤 테오와 한 침대에서 잘 정도로 테오에게 정신적인 의지를 한다. 하지만 권위적인 아버지의 압박도 두려워한다. 이사벨이란 인물은 두 가지 성향을 모두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중간 단계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테오와 이사벨은 시대적으로 시대적으로 저항적인 관념을 가지고 살지만, 사실 사회로 나가 실천적으로 저항하지는 않는다.
유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나체로 함께 목욕하고, 장난치며 지낸다. 그들에게 우연히 다가온 유학생 매튜는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68운동의 중심에서 이방인으로서 외로움을 느끼며, 쌍둥이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상적인 연인 관계를 꿈꾸던 이사벨과 게임을 통해 성관계를 맺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결국 이사벨은 쌍둥이인 테오에게 집착한다. 결국 매튜는 쌍둥이에게 소외된다.
영화광인 그들은 서로 영화 장면을 따라하고 맞추는 게임을 한다. 그 과정에서 누벨 바그의 대표적 영화인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장 뤽 고다르의 <이방인들>, <네 멋대로 해라> 등의 장명들이 삽입된다. 누벨 바그는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여러 가지 독특한 형식 실험과 즉흥적인 카메라 워크와 즉흥 연기 및 점프컷 등 현대적 영화의 문법을 개발하는 등 기존에 것들에 대한 대항이라는 점에서 68혁명의 기류와 시대적으로 함께 했다.
결말 시퀀스의 스토리적 분석
-거실 속 작은 텐트
그들의 마지막 은닉처이자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외부와 단절된 집, 그 집에서도 단절된 유토피아. 세 인물은 점점 더 협소한 공간으로 도피한다. 현실이 자신들의 앞에 더 다가왔을 때 더욱 유아적인 과거의 공간으로 자신들을 몰아넣는다. 즉 이 공간을 통해 인물들이 갖는 현실(68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다. 하지만 이 공간은 추후 세 인물이 박차고 나가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매튜의 불어
미국인인 매튜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불어를 하는 순간이다. 쌍둥이가 하는 불어를 매튜가 취중에 함으로써 매튜의 무의식에서 쌍둥이와 동화되고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이 드러난다.
-초의 크기와 이사벨의 감정 고조
긴 초가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뒤, 크기가 많이 줄어든 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사벨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이사벨의 감정고조를 잘 느낄 수 있다. 초가 타는 동안 이사벨이 혼자 잠들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아차릴 수 있다.
-외설과 예술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나체가 등장한다. 성기 노출도 서슴지 아니한다. 이런 외설스러움은 위반, 도발, 퇴폐라는 성적인 내용을 지닌다. 시대상에 대한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외설스러움이 순수한 예술(테오와 이사벨의 유아기적 모습)로 표현된다. 즉 외설스러움에 가까울 수 있는 68운동의 성격을 예술적인 모습으로 승화시켜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이사벨의 자살 시도
부모님에게 나체로 테오와 함께 잔 사실을 들켰을 때 이사벨은 자살을 시도한다. 이사벨은 영화 중반부에 “테오와 함께 벗고 자는 모습을 아버지께 들키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미리 암시를 했었다. 이 과정에서 누벨바그의 영화인 로베트 브레송 <무쉐트>의 한 장면이 삽입된다. <무쉐트>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던 한 소녀가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소녀에게 자살은 저항의 또 다른 방법이다. 굉장히 부정적이고, 비극적이지만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은 자살뿐이다. 이사벨의 자살과 <무쉐트> 소녀의 자살을 교차편집하면서 긴장감을 형성시키고, 이사벨의 자살의 의미도 환기시킨다.
-시대는 몽상가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밖에서 던진 물건이 집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다. 시대가 몽상가들을 부른다. 결국 그들은 사회로 나가 새로운 유대를 꿈꾼다. 남매는 최초로 유아기적 모습을 탈피하고 거리로 나가 시대의 흐름 속 맨 앞으로 나선다. 이 과정에서 나체였던 인물들은 점점 옷을 입는다. 이는 유아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사회에 나서는 성장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진압대에 대항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동화되지 못한 매튜는 결국 다른 길을 택한다. 그들의 ‘선택은 정말 몽상적인가’ 라는 물음을 관객들에게 던져놓고 있다. 사실 모든 혁명의 시작은 상상이며, 몽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프레임
-삼각 구도
삼각형은 구도적으로는 안정적이지만, 제 3의 축 또는 삼각관계에 의해 조성된 갈등, 부조화를 의미한다. 이는 쌍둥이와 매튜가 전부터 보여왔던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암시적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매튜와 테오
이 프레임에서 매튜와 테오는 직선의 봉에 의해 두 개의 프레임으로 갈라진다. 이는 추후 매튜와 테오가 갈라선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
-결말 시퀀스에서 쌍둥이의 부모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가고, 쌍둥이와 매튜는 계단을 이용해 내려간다. 부모가 탄 엘리베이터는 수직 하강의 이미지로 중량감, 위험, 파괴력의 상징이다. 이는 그 시대의 주도권을 가진 권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계단은 나선형의 이미지로 공포감을 드러낸다. 이는 그 시대 학생들이 가졌던 시대에 대한 공포, 불안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낮과 밤
-부모가 집을 나설 때에는 낮의 평화로운 거리이다. 하지만 쌍둥이와 매튜가 나선 거리는 밤의 거리이다. 어두운 톤의 피사체는 밝은 톤의 것보다 한층 무겁고 또 작게 보인다. 이는 시위를 하는 학생들의 수를 원래보다 더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며, 그들 자체를 중압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 이런 분위기는 성난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더욱 긴장감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시위대와 진압대의 진행 방향
시위대는 좌에서 우로 이동하고, 진압대는 우에서 좌로 이동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좌에서 우로 움직이면 우리의 눈도 편안히 움직인다. 또한 우리의 눈은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데 익숙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우측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적대자로 인식하게 된다. 감독은 이러한 미묘한 자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68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크레딧의 방향과 흑백 전환
영화의 크레딧은 통상적으로 아래서 위로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이 영화는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런 역순행적인 작은 효과를 통해 이 영화가 갖는 저항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다.
또한 엔딩 부분에서 영화는 흑백으로 전환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 중간 중간 나오던 누벨 바그의 흑백 영화를 떠올리게 해서 이 영화가 누벨바그의 정신을 잇는다는 느낌을 준다.
오브제
-모택동 조각상
모택동은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 운동인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어 권력 투쟁을 실행했다. 이는 68혁명의 기조와 뜻을 함께 했으며 이런 모택동은 이 영화에서 68혁명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모택동 조각상 아래에 수표를 넣어둔다. 이는 두 가지의 중첩된 상징이 한 자리에 모여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결국 돈을 밟고 있는 것은 모택동이다. 감독은 이러한 소품을 이용하여 돈에 앞선 68혁명의 뜻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가스 호스
자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하필 가스를 소재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본 가스의 의미는 저 프레임 속 길고 긴 시대의 기류이다. 가스 호스는 시대의 흐름을 뜻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기류는 옛것이고, 멀리서부터 전해져온 기성의 것이다. 이것은 쌍둥이와 매튜를 질식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류도 현실의 혁명 안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이 기류는 결국 쌍둥이와 매튜를 질식시키지 못한다.
편집
-샷의 리듬과 호흡
리듬과 호흡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위에 제시한 장면은 거리에서 물건이 집 유리를 깨고 들어온 순간이다. 이 장면 5분 뒤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기준으로 전후 5분 동안의 샷의 수는 어떻게 차이가 날까. 이 장면 이전의 5분 동안은 13번의 샷으로 이루어져 있다. 5분 동안 13번이면 롱테이크 샷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에 엔딩 크레딧까지의 샷의 수는 35번이다. 빠른 장면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장면 이후는 쌍둥이와 매튜가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인데 감독은 빠른 호흡의 샷의 변화로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압축하고 임팩트 있는 전달을 하고 있다.
음악
이 영화의 엔딩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Non! rien de rien>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영화 라비앙로즈에서 나오는 것처럼 거리의 가수로 시작해서 데뷔를 하고, 연인의 죽음, 자신 또한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드나들며 굴곡진 세월을 견딘 장밋빛 인생이었다. 하지만 결국 노래로서 프랑스인들에게 인정을 받은 샹송 가수였다. 그녀가 간암으로 죽었을 당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가톨릭 교단은 그녀의 삶이 가톨릭 신자의 삶답지 못했다고 미사를 거부했다. 대신 그녀의 장례식은 에디트 피아프를 애도하는 수만 명의 프랑스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 즉 그녀 또한 이 영화에서 보수에 대한 저항, 시민의식의 상징으로 쓰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엔딩곡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 안 해요.
그건 대가를 치렀고 버렸으며 잊혔어요.
과거에 난 신경 안 써요.
68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이 보수와 기성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과 다름이 없다.
정리
실제 68혁명의 정신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몽상가들>의 감독 베르톨루치는 바로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하다 못해 끓어 넘쳤던 시대에 대한 추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 같은 상상력이야말로 자신이 평생 이루려고 하는 영화적 꿈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드러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무력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몽상, 혹은 그 이상의 꿈은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꿈과 같은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역사는 항상 몽상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모든 역사는 항상 몽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