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에서는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구운몽이라는 작품을 처음 접했던 계기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작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그 책을 읽고 나서 어떠한 감명을 얻어, 책을 새로이 사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것도 방금 찾아내었다. 이 일기장에 적어놓은 내용이 구운몽을 처음 읽고 난 후의 감상이고, 내가 다시 꺼내 읽은 동기이니 간단하게나마 그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일기장에 2006년이라 써 있으니 고등학교 1학년 때 작성된 것이다. 나는 이 일기장의 내용으로 그때와 얼마나, 또 어떻게 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은 간략히 다음과 같다.
구운몽이란 소설을 읽으니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 적어보려 한다.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내가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인생무상의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많았다. 삶이란 것은 인생무상에서 자신만의 유(有)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삶의 이유도 모르면서 인생무상을 외쳐 스스로를 호젓이 만드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큰 걸을 바라진 않는다. 그저 인생은 유상일 수도 있다는 것. 삶에서는 인생유상의 일면도 있다는 것이 다같이 알아갔으면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좀 더 의미 있게 보이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그게 물론 가식적인 포장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오늘도 혼자 생각을 썼지만, 언젠가 함께 이야기할 누군가가 생기면 같이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그리고 구운몽처럼 소설로 내 이야기를 담고 싶다. 머리말에는 내 상념과 인생의 양면성도 역설하고 싶다.
참으로 유치하지만, 3년 전에 생각했던 나의 소중한 기억이다. 난 그때 그저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인생무상의 표면적 주제에 빠져 감상을 한 듯하다. 그리고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구운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나의 꿈이 어리광처럼 써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구운몽이라는 작품에 더욱 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구운몽 같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말이다.
예전에 이미 한 번 읽어본 작품이지만 깊은 내용과 감상을 품진 못했다. 그래서 구운몽 수업을 읽기와 쓰기 시간에 듣고 나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 책을 다시 꺼내 보았고, 관련 서적도 뒤져보았다. 구운몽이란 작품은 내 생각보다 여러 방면의 영향을 받았고, 또 그만큼 여러 곳에 영향을 준 작품이란 것을 조금은 깨달았다. 나는 아래로 내려갈 이 글에서 내가 찾은 여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단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구운몽의 작가는 서포 김만중이다. 그에게는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김장생이 증조 할아버지로 계셨고, 그의 집안은 광산김씨 명문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 성장을 이룰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어머니 윤씨는 그가 학문적 성장을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김만중의 면학을 위해 베를 자르면서까지 책을 사줬다는 일이나, 사서와 시경언해를 빌려다가 베껴 읽혔다고 하는 그의 어머니 일화는 유명하다. 김만중은 이러한 어머니의 열성을 통하여 바른 성품과 유교 사상을 배웠고, 효성을 다하는 아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올곧은 정의감으로 왕에게 상소를 올리곤 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해 몇 차례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유배 생활을 통해 그의 사상, 문학관과 학문관을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학문에서도 박학다문한 학자였고 한편, 다른 나라의 언어적 특성을 간파하고, 한국 사람은 한국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국민문학론을 피력한 선구자였다.
한편 그가 구운몽을 창작한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일단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창작 동기는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이다. 바로 노모를 위한 창작이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청춘과부였다. 그래서 김만중은 자신이 귀향을 가게 된 후 어머니가 허무한 삶을 한탄하고 살까 우려를 하였다. 그래서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서포 김만중은 평안북도 선천 유배 시절에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을 위로하고자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는 어머니의 고통이 한 순간임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다른 집필 동기가 있다면 위에서 말했던 국민문학론에 관련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만중은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찍이 한글로 된 소설을 썼다.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현재에는 이것이 당연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한문이 인정받고 가치 있는 글로 여겨졌던 당시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말과 글이 천박하다고 생각되던 시대에 이런 주장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이 한글판과 한문판이 모두 전해지고, 어떤 것이 먼저 집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구운몽이란 소설을 통해 한글의 가치를 드높이려 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
구운몽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육관 대사와 성진, 그리고 팔선녀이다. 육관대사는 성진의 스승으로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불법을 베풀며 성진과 팔선녀를 인간계로 보내 깨달음을 얻게 한다. 그리고 성진은 육관대사의 수제자로 세속적 부귀공명에 번뇌하다 인간계로 추방되는 인물이다. 하룻밤 꿈인 양소유의 삶을 통하여 인생무상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 불도에 정진하며 극락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팔선녀는 남악 형산을 다스리는 위부인의 시녀들인데 성진의 현세적 욕망을 자극한 것을 계기로 인간계에 환생하여 양소유의 여덟 부인이 된다. 그리고는 선녀로 되돌아와 삶의 근본 이치를 깨닫고 불도에 귀의하여 성진과 함께 극락세계로 가게 된다. 이처럼 크게 세 분류의 인물은 서로 얽히며 소설의 구성을 만들고 있다. 현실과 꿈, 그리고 다시 현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그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던져 준다.
또한 구운몽에는 여러 가지 인상 깊은 부분이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를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운몽의 주제가 잘 들어나는 부분과 이 소설의 대표적인 사상인 불교의 특징이 들어난 부분, 마지막으로는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일단 구운몽의 주제가 잘 들어나는 부분으로 소설에서 나오는 한 시구이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현상 세계는 마치 꿈같고, 헛것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또 이슬과 번개와 같아서,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고 볼지어다. 이 시구를 통하여 현실 세계의 유한함과 소멸성과 순간성을 표현하여 인생이 덧없다는 주제를 살리고 있다. 이 짧은 글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이 주제를 또 한 번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에 인상 깊었다.
또한 이 소설이 불교에 귀의하는 내용인 만큼 불교의 특성이 드러난 부분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즉시 대경법(大經法)을 베풀어 성진과 팔 선녀를 가르치니 인간 세 상의 모든 변화는 다 꿈 밖의 꿈이요,
한 마음으로 불법에 나아가니 극락 세계의 만만세 무궁한 즐거움이었다.
불교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현상은 그 무엇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윤회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성진이 깨달음을 통해서 극락세계로 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윤회 사상이 드러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주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장주 되니 어니 거짓 것이요 어니 진짓 것인 줄 분변치 못하나니,
어제 성진과 소유가 어니는 진짓 꿈이요 어니는 꿈이 아니뇨?
위 문장 또한 이 소설의 주제를 잘 드러낸 대목이라 볼 수 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구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소설은 불교뿐만 아니라 많은 배경 사상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가장 근간이 되는 사상은 불교로 보이나, 다른 면면을 살펴보면 더 풍성한 사상들을 엿볼 수가 있다. 일단 대표적으로는 불교 사상을 들 수가 있다. 이 소설의 큰 주제가 공명과 부귀가 일장춘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공사상과 윤회사상은 구운몽의 주제이자, 가장 드러나 있는 사상이다.
그 다음은 유교 사상에 관한 것이다. 구운몽에서 크게 유교 사상에 대하여 3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군신의 윤리가 들어난다는 점이다. 왕이 강제로 권력을 이용하여 양소유에게 강제 결혼을 맺고자 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입신양명과 효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 후의 양소유는 그의 죄를 불교의 교리에 따라 뉘우치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교리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유교경전을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를 보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이는 유교의 입신양명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또 입신양명이 곧 효를 의미했던 유교 사상을 통해 효의 의미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구운몽에서는 유교사상에서 나타나는 우애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는 구운몽의 8선녀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떠나 형제의 의로 맺기를 원하고 있다. 이는 유교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도교 사상에 관한 것이다. 용왕, 위부인, 팔 선녀 등의 등장인물들의 도술을 통해 들어난다. 또한 도교사상은 사상적 배경이 갖고 있는 도교의 원리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교의 원리에 이어서 道는 무명이요, 無이며 만물이 있게 된 근원이다. 따라서 有가 있기 전에 無가 있어야 하고 이것에서 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교적 사상 또한 구운몽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처사도 역시 신선이었으나 인간세계에 내려와 살다가 다시 선계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데, 이는 자연 그대로의 현상인 동시에 자기존재
를 성립시켜 저절로 움직이는 경지이다. 양처사야 말로 이런 면에서 보다면 도를 아는 도인이요 자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구운몽은 문학적으로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단 몽자류 소설의 효시라는 점이다. 구운몽은 이원적 환몽 구조를 지닌 몽유소설로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꿈과 현실의 이중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구’는 성진과 팔선녀를 포함하는 소설의 인물을 표현했으며, ‘운’은 구름과 같이 덧없다는 뜻에서 주제를 나타냈다. 그리고 ‘몽’은 현실, 꿈, 현실을 오가는 소설의 구성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구운몽은 지상의 부귀영화가 있는 삶과 천상의 구도자로서의 삶을 대비해서 보여 줌으로써,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하는 보다 높은 문학적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구운몽에는 ‘유불도’의 사상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교의 공사상과 윤회 사상, 유교의 입신양명과 부귀공명, 도교의 비현실성 등이 혼재되었다는 것이다.
구운몽의 세 번째 가치는 양반 소설로서의 의미이다. 구운몽은 양반들의 일부다처제의 모습 등 생활이념이 곳곳에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양반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양반소설이 그러하듯이 현학적인 문어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후기의 불안정한 정치 현실과, 당대 사대부들의 삶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네 번째는 국문소설로서의 가치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김만중은 "어느 나라 말이든 그 나라 말만이 참된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한글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 구운몽은 김만중의 이러한 우리말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에서 비롯한 한글로 쓰인 국문소설이라는 데에 그 문학적 가치가 높다.
그밖에 구운몽의 가치는 더러 있다. 이 소설로 인하여 우리의 고대소설의 형식이 완성되었다는 평도 있고, 어지러운 정계에서 회의를 느끼고 쓴 작가의 인생관이 잘 드러난 것도 이 작품의 가치이다.
이렇듯 구운몽이란 이 역작은 그저 하나의 작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역사적, 종교적 가치를 따지면 정말 엄청나기 때문이다. 내가 많은 것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본 것이 이만큼이라면 사실 구운몽의 가치는 내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구운몽은 인간의 부귀공명의 덧없음을 주제로 담아낸 하나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 지닌 작품이다. 내가 그저 이 소설을 독자들에게 세속적 부귀영화의 덧없음, 즉 인생무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았었다면, 지금은 그 바깥쪽의 큰 틀을 본 것 같다.
구운몽은 사람들에게 인생무상이란 주제를 던져주어 그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또한 인생무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에 대한 무책임을 부추겨 더 의미 있는 인생유상을 만들게 해 주었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감상을 하였고, 그것은 내 인생의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이는 인생에서 꼭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무겁고도 중요한 과정이니만큼, 이 소설은 앞으로도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