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하의 압구정동,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 속의 교회
우리는 환경 속에서 살아갈 때 적응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그러면 적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주변 환경과 가까워진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친숙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과 친숙해지면, 그것들을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TV 속 광고를 보고, 또 극장에서 흥행 영화를 보고, 고음질의 스피커로 최신 가요를 듣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친숙한 것들이다. 그렇게 주변과 친숙해지고 주변에 길들여지며 자라왔다. 하지만 그 친숙이라는 단어 뒷면에는 깜짝 놀랄 만한 다른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왔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통찰해내는 관찰력과 분석력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말한 것들을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장 보드리야르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가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을 해낸 인물이다.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흡수하여 현대인들의 일상 속을 경험적으로 분석했다.
시뮬라시옹. 보드리야르 이론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시뮬라시옹을 이해하려면 시뮬라크르라는 실재가 필요하다. 나는 시뮬라시옹을 시뮬라크르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쉽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시뮬라크르가 존재하고, 그 시뮬라크르라는 모방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현실은 시뮬라크르라는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게 되므로 시뮬라크르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를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말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이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현대인들의 종교성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일단 우리에게 가장 친숙해진 것부터 하나하나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는 물론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분석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TV를 본다. 바보상자라고 하는 것에 이끌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응시한다. 물론 바보상자를 바보처럼 보지 않으려 노력은 한다. 능동적인 자세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프로그램과 광고를 평가해낸다. 하지만 그런 능동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수동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결국은 TV라는 시뮬라크르 속에서 본질을 잃고, 모방에 적응해간다. TV는 실재 세계와 다른 새로운 사실, 즉 과현실의 세계이다. 아까 말했던 하이퍼리얼리즘이 과현실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TV 속 과현실은 극사실적으로 현실을 뛰어넘어 더 현실 같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TV는 그런 유혹적 세계이다.
그렇게 TV 속의 영상에는 프로그램 제작자의 자의적 조작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이 제작 의도라고 보면 된다. 사람들은 제작 의도에 따라 기호에 맞게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익숙해져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시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또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의 이데올로기가 시청자들에게 주입이 되기 쉬워진다. TV 속의 과현실이 현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시뮬라크르의 힘과 상징성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법이라는 것이 위험성을 지니는 이유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능동적으로 흡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권력의 힘은 이 시뮬라크르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TV처럼 신문, 인터넷, 라디오 등 다른 매체들도 시뮬라크르로 존재하고, 하이퍼리얼리즘을 형성해간다.
영화도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보면 될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문화 읽기>라는 책에는 그가 영화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순수한 매혹이자 이미지의 매혹입니다. 이미지가 아주 강한 영화의 상상적 세계는 존속합니다.” 그리고는 말한다. “모든 영화는 저급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상상적 세계의 차원에서는 대단한 것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비현실은 현실보다 더 많은 신뢰성, 정확성의 차원에 속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비현실은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영화는 상상적 세계의 차원일 뿐이다. 적당한 선을 긋고, 영화 속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성에 대한 시뮬라크르도 존재한다. 바로 포르노다.
<섹스의 황도>를 보면 보드리야르는 포르노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정밀한 묘사화는 실제 공간에서 한 차원을 제거해버리는데, 그것이 그 묘사화로 하여금 유혹의 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에 포르노는 성의 공간에 한 차원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하여 포르노는 성을 실재보다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포르노에 유혹이 부재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이렇듯 포르노는 위에 제시한 시뮬라크르의 공식에 알맞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포르노라는 것은 현실과 공간을 두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은 현대인들의 욕구를 이용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보드리야르는 이런 말을 했다. “포르노에서는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환각이 지배하고 있다. 이미 과학에 의해 우리는 이런 식의 미세한 현미경적 관찰에 익숙해 있다. 또한 우리는 극히 작은 세부 항목에서 과다한 실재를 대하는데 익숙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의 구조를 그린 기초 도면과 정확한 것을 훔쳐보려는 욕구에 길들여져 있다.” 이렇게 시뮬라크르는 우리가 익숙해진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포르노는 현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성 행위를 묘사하여 현대인의 욕망을 쾌락 속에서 실현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음악에도 적용이 된다. 스피커를 통한 음악이라는 것은 현실의 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음을 모방하여 기계의 음을 이용한다. 아무리 고음질의 스피커가 발달된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의 너무나 쉽게 빠지면 안 될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실을 담고 있는 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시뮬라크르에 도취되고, 빠져버리는 이 시대의 현상을 종교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 종교성은 권력, 재화 등 모두 친숙한 것에서 비롯된다. 나는 서두에서 이 친숙이란 단어의 뒷면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을 했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을 보드리야르가 알려준 것이다. 친숙의 뒷면에 써 있는 글귀는 현대인들의 욕망, 즉 종교성이다.
현대인들의 종교성은 특히 소비활동에서 두드러진다. 이에 대해서도 보드리야르는 할 말이 많았다. 보드리야르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중시하였던 베버와는 다르게 생산 관계보다 사물의 기호학적 가치, 즉 소비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우리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직접적인 기능보다는 그 이미지를 사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는 생산과 노동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의해 확장된다고 제시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물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는 것이다. 사물의 기능을 기호로 파악한 보드리야르 특유의 기호학적 사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바바라 크루커는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였다. 현대인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글귀가 아닌가 싶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생산자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생산한다고 하였다. 즉 상품의 사용 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 가치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신의 삶에서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것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생산자들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기능에 의한 재화가 아닌 욕구와 유행에 의한 재화를 소비하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는 기호와 이미지에 의하여 통제되고 조작되고 있는 시뮬라시옹 시대에 살고 있다. 축구 용품 하나를 사더라도 브랜드의 물건을 선호한다. 여기서 선호한다는 뜻은 기능이 좋은 브랜드를 선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능이 좋다는 변명 아래 이미지를 찾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예는 세탁기인데, 우리는 멀쩡한 세탁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행을 따라 그것을 바꿔야 한다는 착각을 통하여 소비를 한다.
브랜드가 종교가 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종교라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다. 즉 이 종교성은 브랜드와 관련되어 버린 것이다. 신자본주의를 통한 현대인들의 불균등한 소득수준은 소비의 차이를 낳고, 그러한 차이는 소비의 종교성을 분명히 한다. 소위 부르주아들이라 부르는 자본가들은 그들의 우월 심리를 통하여 브랜드에 심취되어 소비하고, 그것은 하나의 종교성을 띤다. 또한 자본가가 아닌 사람이라도 모방 심리와 유행을 통한 또 다른 종교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프랑스와 유럽에는 68운동의 큰 사건이 지나가고, 자유와 평등, 욕구 분출의 과정이 산업자본주의의 흐름 위에서 생성되었다. 보드리야르의 <소비하기>도 그 무렵 출판되었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적인 배경을 따라 소비 시대에 대하여 분석을 해내었다. 사회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소비 사회에서 문학적 분석을 해낸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유하라는 시인이다. 유하는 유럽에서 68운동 이후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한국이 비슷한 형태의 시대가 되자 그것을 적나라하게 꼬집는 시집을 냈다. 보드리야르와 비슷한 우려를 시를 통하여 나타낸 것이다.
유하의 대표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그는 소비 사회 속의 허영을 보여준다. 유하는 압구정동이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라고 표현한다.
“이곳 어디를 들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압구정동은 티비 속 광고에서 나온 모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람들의 허영심은 압구정동에서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꿈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증폭시킨 자본주의 상징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자본주의에 붙잡혀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런 현대인에 대한 비판은 다른 시에서도 연달아 찾아볼 수가 있다. 현대인들을 똥파리, 오징어, 산낙지 등에 비유하며 똑바른 시선을 두지 못하고, 진정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한 무기력한 그들을 비난한다.
그렇게 유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 비관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계속되는 시집들을 통하여 세운 상가와 경마장 등을 욕망의 공간으로 두고 쾌락과 허영에 빠진 현대인들을 비판해낸다. 또한 대중문화를 경멸하는 태도로 대중문화의 영향에 빠져 있는 우리를 문화적 욕망 속에 가두기도 한다. 욕망의 정체를 보려 했던 시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욕망에 대한 시적 진실의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유하는 이런 현대인의 소비 체계 속에서는 교회 또한 하나의 소비 형태가 될 수 있다. 소망 교회를 욕망의 파티장으로 표현하며 종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으며, 소망 교회를 욕망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교회의 상업성을 비꼬고자하는 목적을 드러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와 종교는 빈번히 마주한다. 교회는 큰 간판을 켜고, 거대한 교회당 안에 신도들을 효율적으로 집어넣는다. 신도들은 자신의 금력을 과시하며 십일조를 낸다. 그 과정에서 이미 성스러움은 느껴보기 어렵다. 교회의 성스러움은 자본에 의하여 때가 탈 수밖에 없고, 인간은 성스러움과 속됨(돈) 사이에서 속됨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성스러움을 포기하게 되고, 현대의 종교성은 속됨과 결합된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종교에 대한 종교성 안에서도 욕망을 향한 종교성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듯 유하와 보드리야르는 욕망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헛된 종교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을 통하여 사회와 권력과 매체에 길들여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들의 욕망, 욕구, 본능을 이용한, 그들의 종교성을 이용한 많은 일들이 아직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결정지어야 할 것은 헛된 허영에서 멀리 떨어져가는 종교성을 되찾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껏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유하의 시집을 이용하여 현대인들의 소비적, 쾌락적 종교성을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면, 지금부터는 현대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