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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이곳이 야생이고,
야생도 하나의 문명이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후기

by 오로지오롯이


들어가며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은 생각은 크게 없었다. 왜냐하면 책을 읽어갈수록 나에게 남겨지는 것은 불명확한 이해와 뒤섞인 개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라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것이 나의 내면을 건드리는 더 좋은 재료가 된다고 판단하였다.


어쩌면 너무나 생소하고, 복합적인 부분이 이 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보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관심이 갔던 1장과 5장, 6장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는 있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레비스트로스와 나 자신의 교감을 확인해보고, 공감을 이끌어 내보려 했다. 그것이 이 책의 분석과 감상에 들어가기 전 나의 태도이다.


이 책은 구조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만큼 저자의 이론과 사상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구조주의적인 사고의 효과와 현실성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통시적인 역사성은 상대적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어 객관적이지 못하나, 공시성을 띠는 구조주의는 분석적인 이성으로 사건의 세부적 관찰, 분석, 분류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연구자의 주관이 배제된다는 것을 반영했다. 이는 곧 변하지 않는 가치인 “진리”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구조인류학이라는 사실을 역설한 것이 아닐까. 나는 저자의 이런 태도에 공감할 수 있는지 교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며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히 문화상대주의적인 이 책에서 저자가 야생의 사고와 풍습에 대해서 어떻게 재평가하고 있는지, 사고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양식은 무엇인지 초점을 맞추고 계속 이어가려 한다.



1장. 구체의 과학


1장은 이 책의 주제라고 판단했다. 레비스트로스가 하고 싶었던 말을 집약시켰던 커다란 메시지가 포함된 장이라 생각하였다. 1장에는 어느 문명사회나 자신들의 사고가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 말하며,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뭔가에 찔린 듯 마음 속 깊이 아린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이 세상과 전 인류를 품을 만한 여유와 능력이 부족하기에, 막상 주변의 것들을 적용하게 되었는데, 내가 어떠한 허영과 자만을 품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데에 급급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또한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며, 현재의 내 내면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와서, 이렇듯 1장은 우리가 미개라고 칭하는 원시들의 구체적인 사고들이 마땅한 체계와 유지를 갖추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긍정적인 면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원시인들의 사고는 추상적이고, 신화적이지만 오히려 복합적이고, 의미 있게 짜인 체계라는 것, 그것은 곧 문명사회라고 칭하는 세계의 과학처럼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물론 원시인들의 주변에는 넉넉지 않은 재료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원시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기의와 기표를 통한 신화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원시와 문명의 차이가 맞고 틀림의 차이가 아닌, 다름의 차원에서 분석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원시의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사고는 “손재주”로 표현되는데, 위에 서술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문명보다 많지 않는 재료들, 가공되지 않은 재료들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순간 마다 손재주를 통한 끼워 맞추기 식 사고를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서구 사회의 과학자들과 다른 관점의 사고방식이나, 서구의 과학자나 야생의 손재주꾼 모두 항상 메시지를 찾고 있는 점에서 다름과 같음을 설명하였다. 이런 신화적 사고는 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수시로 과거의 메시지를 통해 현재의 손재주의 끼워 맞추기가 반복되는 것이고, 이는 세대가 연속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고, 재생산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현재의 것들은 과거의 반영이며, 현재는 과거를 품고 있다는 점을 통해 야생의 공시적 개념을 표현함으로서 저자의 구조주의적 판단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았다.


또한 저자는 “인디언들은 서구인들처럼 한낱 즐기기 위해 꽃을 꺾지 않는다. 식물에는 그 꽃의 신성한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야생 문명이 갖는 낭만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이 표현을 통해 저자는 서구 문명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면모를 야생의 세계에서 엿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이는 야생의 사고가 마땅한 체계를 유지한 사회라는 주제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는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이처럼 1장은 주제를 드러내고, 다른 장들을 포함할 수 있는 집약적인 ‘야생의 사고’이기에 관심을 접어둘 수가 없었다. 1장을 통해 다른 장들을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주제는 문화상대적이고 공시적인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인 판단이었으며, 그것은 내가 이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5장. 범주, 원소, 종, 수


이 장은 크게 원시의 토템적인 ‘분류’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분류를 통해 사고가 확장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개념들을 이 감상문에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토템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분류의 체계가 해체와 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복합적이고, 객관적인 형태의 구조로 재생산됨을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종의 개념은 객관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종의 다양성은 객관적인 부호화의 감각적 표현이라고 서술했다. 이런 판단의 과정은 2~4장으로 이어오던 토테미즘적 사고가 구조주의적인 판단 아래서 가장 객관적이고, 공시적인 개념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자의 말처럼 사회에서는 공시성과 통시성의 싸움이 항상 반복되며, 그 결과는 언제나 통시성이 승리하게 마련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5장을 주목했다면, 이 5장의 대목이 “야생의 사고”라는 책에서 가장 구조주의적인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이 잘 반영이 된 것이 아닐까 싶었고, 그런 연유로 자세히 이해되지 않지만, 이 장을 주목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6장. 보편화와 특수화


6장은 5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았다. 토템적 사고는 종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체계로서 보편화와 특수화의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에서는 아이의 머리모양을 토템의 동물에 따라 다르게 하는 과정이 표현되는데, 이는 특수화의 개념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한정되어 있는 영역과 공간을 ‘조직화’하는 대목으로 토템적 사고의 보편화를 설명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장의 내용 중 쌍둥이를 새와 같이 초자연적 기원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며, 또 다른 족은 쌍둥이를 물고기와 결부시키고, 상황에 따라 다른 쌍둥이의 이름을 붙인다는 대목이 나온다. 저자는 이를 두고 이와 같은 야생의 관습은 서구사회에서 장남이게 부계 조부의 세례명을 붙여주는 관습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6장은 5장에서 드러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적 관점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1장이 품었던 주제의 의미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독자인 내가 6장을 주목한 것은 독서 도중 조금씩 놓쳐갔던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을 다시 붙잡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 계기를 통해 내가 야생의 사고가 나에게 주는 막연한 먼 세계와의 교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책을 통해 자기우월적인 서구 사회를 꼬집는 행위가 되었다면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관용의 태도를 취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문화라는 것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반성할 수 있는 개념이다. 사실 내가 찾은 교감은 사실 먼 세계인 야생이 아니라 주변의 것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행했던 것들로 연결되는 것이다.



마치며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통해 야생과 다른 문명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야생 그 자체에 집중하였다. 우리는 흔히 야생을 주술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판단하며 야생의 인간들을 미개인으로 칭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을 통해 야생의 사고가 갖는 내재적은 규칙과 논리를 구축하는 과정을 보인다. 즉 야생의 사고는 사물을 체계화시키는 방법과 결과가 다를 뿐이지, 그것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발전되고, 무의미에서 의미로 발현되는 과정은 그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이며, 그것은 야생의 사고에서도 확인됨을 보여준다. 결국 이 책은 야생의 주술적 사고는 충분히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체계’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어느 문명이나 사회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체계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야생도 다른 문명처럼 일반화가 가능하고, 그 가능함을 이 책을 통해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제를 구조인류학적인 관점을 통해 드러냈는데, 저자는 그 어떤 문명 자체를 연구하였고, 그 문명이 과거에 어떠했는지, 현재는 과거에 비해 더 나아졌는지는 파악하지 않았다. 문명이 발전했는지는 저자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로써 저자가 확인한 것은 인류학이라는 개념이 어떠한 발전의 단계가 아니라 각자의 체계를 가지고 형성되는 독자적인 과정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문명과 사회에 관한 관점을 통해 더 나아갈 것은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을 통해 야생의 사고를 논하였지만, 사실 인간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구의 사회와 야생의 사회를 구조인류학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사회 속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 끌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려운 개념 속을 헤매면서도 무엇 하나 주워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이 던진 메시지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 책을 조금이나마 분석해보고 싶은 것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인 관점과 문화상대주의적인 판단을 해석해보고 싶은 것도 사실 인간 개개인이 갖는 하나의 체계를 인정하고, 그 무엇도, 그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 속의 인간을 존중하려는 내 다짐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라 할 수도 있고,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을 존중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와 사회, 인종과 인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꾀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은 역사주의적인 성찰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으나, 전인류적인 인간의 체계와 사회의 정체성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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