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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발자크에게 배우는
작가의 태도

스테판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 분석 및 감상

by 오로지오롯이


들어가며


오래 전 기억하는 발자크는 내게 그리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 할 테지만 어찌 되었든 발자크는 다른 어떤 작가의 경우보다도 더, 성격 규정을 내리는 데 상방된 논의들이 분분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19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현대소설의 작가이고, 그의 리얼리즘은 전형적 성격의 창조를 통해 총체적 형상화에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츠바이크는 발자크에 대해서 사실상 어떤 형식을 택했어도 천재성이 드러났을 위대한 천재에 속하는 인물이라 표현할 정도이다. 그러나 츠바이크도 결국은 그의 천재성이 그의 의지력에 있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발자크는 자신의 90여 편의 자작 소설을 총서로 묶어 내면서 ‘인간 희극’이라 이름 붙였고, 또 다른 방대한 작업을 동반했다. 그렇기에 리얼리스트 발자크나 관찰자 발자크, 역사가 발자크가 있는가 하면 환시자 발자크나 시인 발자크, 철학자 발자크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이 많은 수식어들을 명명자들의 자의에 의한 것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들은 발자크가 남기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과 그 말을 통해 창조된 드넓은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명명된 발자크의 발자취인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수식어도 포함할 수 없는 인물일 수도 있다.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그에게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쉽게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발자취를 천천히 읽어 내리려 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발자크의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발자크에 있어서 어느 한 텍스트의 독서일지라도 반드시 다른 텍스트의 독서를 연쇄적으로 불러 온다는 그 말에 주목하고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품 상호 간의 교호 작용을 생각해보고, 각 소설들 간의 독특한 양상을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에 집중하며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발자크 작품에 대하여


일단 발자크의 대표작인 소설 ‘고리오 영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실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가 실험, 연습을 거듭한 끝에 그의 비전이 작가적 과정의 전환점에서 종합되고 체계화되면서 얻어진 산물이라 평가 받기 때문이다. 발자크 세계의 규모와 가능성을 지닌 작품이며, 그가 이전에 쓴 작품들 속에서 다듬어진 인물과 생각과 기법들은 고리오 영감 속에서 결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리오 영감’이 발자크적 소설의 완벽한 메커니즘이 구현된 첫 번째 예라고 인정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단 ‘인물의 반복 등장’이라는 새로운 장치가 한 몫을 했다. 이런 작중 인물들의 재등장이라는 기법의 사용으로 발자크의 소설들이 서로 연결되어 시리즈로 구성될 수 있게 했다. 그런 인물들은 서로 대립, 대조, 대칭의 관계를 이루고, 마찬가지의 상황 속에 산재해 있으면서 여러 시리즈에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설 안에서 발자크만의 세계가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발자크의 작품에서는 허구의 삶과 현실의 삶 사이의 경계를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리얼리즘 소설의 아버지라는 평가받고 후대에도 리얼리스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그가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역사상 실재한 인물과 환상과 허구의 인물을 병치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일찍이 발자크는 천성적이고 무의식적인 성향에 가까웠다. 일생 동안 영적인 현상들의 풍성함에 압도되었던 발자크는 인간희극을 쓰기 오래 전에 이미 이 거대한 카오스를 외면적인 질서로 바꾸고, 그것을 주제별로 혹은 법칙에 맞게 분류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후 혁명으로 무거운 기운이 파리를 짓누를 때 정치, 사회 현실과 자신과의 단절이 점점 더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구축해 놓은 소설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주목할 것은 환상적인 그의 작품의 특징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초자연적인 환상에 빈번히 현실의 논리를 개입시켰다는 것이다. 즉 환상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안고 환상도 현실의 논리로 부연 설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발자크의 ‘멜모스’에서 은행의 업무 시간이 마감된 후 보안이 된 방 안에 혼자 남아 비밀스럽게 서류를 위조하고 있는 카스타니에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장면은 멜모스가 시공의 제약을 초월할 수 있는 환상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강조된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방 안의 난로가 발산하고 있는 가스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보이는 허깨비일 수도 있다는 암시가 함께 곁들여진다. 카스티에게만 들리는 신비로운 목소리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멜모스의 목소리지만 카스타니에 양심의 가책이 만들어낸 목소리이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내적 갈등이 빚은 소리라고도 해석할 수 있도록 정황이 설정되고 있다. 즉 발자크가 현실과 환상의 끈을 계속 이어가려는 리얼리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을 환상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해하도록 여지를 남긴다는 점, 환상 장르에 속한 작품에 현실을 과도하게 개입시켰다는 점 때문에 발자크는 비판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발자크가 구축한 리얼리즘적 작품 세계이며, 그만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을 침범하여 그것을 변질시킨 것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속성 그 자체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환상적이 된 것이라는 발자크의 태도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발자크가 사실주의 기법으로 어떻게 시대상을 표현했는지 집중하고자 한다. 발자크는 작중인물들의 외모, 거주지, 직업, 그리고 사상 등 모든 것을 그려내려 했다고 평가 받는다. 즉 발자크에게 있어서 소설은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이자 역사이고 철학이며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연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발자크는 비전을 제시하는 시인 혹은 예술가에게 학자나 국가지도자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기도 했다.


다시 돌아와서 발자크의 리얼리즘적 묘사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그는 이 세계를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외적인 현실의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 보다는 개인의 비전 속에 잠겨 있는 외적 현실, 외적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 구축하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묘사하려 했다. 그런 시각은 발자크의 리얼리즘적 묘사의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자크는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허구의 작가가 아닌 연구의 저자로서, 사상가로서 자신의 문학관과 사회사상과 세계관을 실명으로 개진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풍속소설이기 때문에 사회적 인간의 미덕과 악덕을 아울러 그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부도덕한 작가라는 모랄리스트의 비판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리얼리즘 문학의 진정성을 적극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로서 배울 점


평전을 읽는 내내 느낀 발자크의 외면적인 감상은 그가 어떤 방식이든지 다작을 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평전에서도 나오듯이 발자크의 유일한 명예욕은 어떤 자리든 어떤 수단을 쓰든 상관없이 자신의 힘을 방출하는 것, 써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발자크의 괴기함은 성공한 직업 소설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많은 텍스트를 생산했고, 게다가 그는 메시지의 게으른 전달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산자이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원했다. 그의 글쓰기는 완전히 직업적인 실천에 도달하고 살기 위하여, 부채를 갚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그에게는 자기 확인의 근본적인 법칙이었던 것이다. 곧 그것이 발자크에게는 현실이었고, 리얼이었다.


이렇듯 발자크는 인쇄업의 파산으로 진 빚을 글을 써 갚아 나가기도 했지만, 문학에서만큼은 금전상의 보상이 아닌 영광만을 찾은 작가라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그가 산업 문학과 거리가 먼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다작으로 인한 금전상의 보상보다는 원고료나 출판 계약의 조건 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치밀한 계산을 하면서 작가의 권리를 주장했다. 발자크의 위엄은 과거의 신분 질서나 문예옹호제도가 사라진 시대에 문학이라는 노동에서의 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실천한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라는 것에 권위와 명예, 그에 따른 마땅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두 번째는 발자크 소설의 묘사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인간 속에 감춰진 작지만 잔인한 것, 천박하게 추악한 것, 감춰진 폭력을 보았고 묘사하려 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지극히 작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세부묘사였다. 발자크는 그런 세부묘사가 위대한 소설에 설득력 있는 생명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세부묘사에서 진실성과 성실성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진실성과 성실성이 없이는 예술이 탄생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발자크의 소설에서는 단순한 보고 대신에 생생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즉 발자크는 전투의 보고가 아니라 전투 자체를 들려주고, 서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극적인 줄거리, 즉 소설적인 줄거리를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발자크의 소설은 지극히 조직적이고 지루하다 할 만큼 빈틈없는 묘사로 서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발자크는 시대를 잘 이용한 작가라는 점이다. 발자크가 살던 그 당시에는 프랑스 혁명 때부터 마차를 이용한 우편 제도가 정비되어 궁벽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도 단기간에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는 시대였다. 발자크는 그 현실을 잘 파악해냈다. 이 무렵 책이란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해서 약 10만 원 정도 하는 상당히 비싼 상품이었는데, 발자크는 소설을 읽는 독자층의 중심에는 활자에 목마른 부인들과 젊은이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 사람들은 비록 지방에 살더라도 소설을 읽음으로써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소설은 19세기의 가상현실이었는데, 발자크는 이러한 소설의 본질을 잘 이해했다. 우편물을 이용하여 지방까지 자신의 소설을 판매할 수 있는 시대와 독자의 성향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이후 발자크는 이렇게 빠져들어서 이 흐르는 돈벌이에 맛을 들였고, 점점 더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그렇기에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풍속 소설이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발자크가 자신 작품의 완성과 자신의 예술적인 명예가 걸린 문제에서는 가장 양심 바르고 끈질기고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의 주요 사건을 선택하고, 성격들의 특징들을 결합하여 전형을 구성하고, 많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잊힌 역사, 즉 풍속사를 쓰려 한 것이다. 발자크에 의하면 소설은 기존의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누락시키는 이면의 역사, 생생한 삶의 역사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풍속 소설이 '풍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예술적인 경지를 논하기 위해 고민했고, 그 시대의 사회와 인물들의 특징을 살려내려 했다. 이렇듯 발자크는 '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이용하면서 그 '시대'를 그려냈다. 즉 발자크는 저속한 야망과 숭고한 야망을 함께 지닌 작가이며 시대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영악하고도 영특한 작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학사적으로 보면 발자크의 작품들이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그에게 이르러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설정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여러 세기를 거쳐서 농민 등과 같이 지방을 다루는 작품은 생산되어 왔으나, 지방을 해학과 풍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역동적인 현실’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발자크에 와서라고 평가된다. 즉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발상의 전환, 즉 작가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마치며


프로스트는 발자크의 문체에 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프로스트는 실체에 어떤 불순함도 스며들지 않도록 모든 것이 반사되어 있는 플로베르식의 문체가 발자크에게는 전혀 없다고 보았다. 또한 모든 잡다한 요소들이 소화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발자크의 문체는 반사하거나 암시하지 않고 설명하기 때문에 어떤 미학적 조화도 찾아볼 수 없다고 혹평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비판이 발자크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는 다작을 했고, 수많은 영향을 끼친 문학사적으로 큰 인물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완벽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런 비판 자체도 옳은 판단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의 풍부한 현실 관찰 능력과 진실성 있는 인물들의 구현을 본받을 수 있다. 우리는 발자크의 시대에 살지 않았음에도 그가 살던 사회 풍속의 묘사를 통해 운동 중에 있는 프랑스의 사회와 문학을 독특한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시대적으로 낭만주의의 한복판에 자리하면서도 리얼리즘의 기틀을 마련한 발자크는 문학사에서 한편으로는 하나의 모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그런 역할을 하는 발자크가 방대한 작업을 한 것처럼 우리는 그를 연구할 주제들이 아직 넘쳐날 것이다. 그런 그를 한 번에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느껴져 작품들을 앞으로 찾아볼 계획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많은 감상을 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발자크를 읽음으로써 자극이 되었던 부분과 앞으로 자극이 될 부분들을 잘 활용하여 조금 더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유쾌하고 흥미로웠으며, 그만큼 좋은 기회였다. 오래 전 주워들은 말로 상업 작가라는 이미지로만 내 머릿속에 박혀 있던 발자크가 내 안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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