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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라 Jun 17. 2022

중소기업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

'잘한다'의 차이


"퇴사하겠습니다."

"난 OO 씨가 필요해. 퇴사는 안돼."





'잘한다'의 의미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집안 살림이 어려워졌다.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IMF를 맞아 일어나지 못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스토리다. 전액 장학금 받을 정도의 머리도 아니고 평범했기에 일단 휴학을 했다. 돈을 벌어야 할 것 같다는 어머니 말씀에 일자리를 어떻게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소개로 인사동 공예품 전시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론 알바로 말이다.

고민할 것은 없었다. 부모님이 휴학을 하라고 정해 줬고, 지인이 자기가 일하는 회사에 나오라 했다. 경력도 전공도 졸업도 아무것도 없던 21살 어린 여자아이가 사무실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시키는 허드렛일. 원장님 손님이 오면 고풍스러운 다기에 고급 녹차를 조금 우려 실용성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은 100% 디자인 작품인 거북이 다기세트에 깨질세라 조심조심 들고 들어간다.

깔끔한 슈트 차림, 머리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중년의 멋진 부장님이 A4지에 손글씨로 써주신 공문을 한글 프로그램으로 열심히 만들고 다듬고 대 여섯 번의 수정을 거쳐 프린트를 해드리면 점심시간이다.

작품 전시 담당자가 '00 씨 여기 프런트 좀 봐줘요.' 그럼 또 조용히 가서 앉아 지시한 일을 해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업무의 다였다. 얼마뒤 나는 '일을 잘한다.'라는 소리를 들었고 알바가 아닌 계약직 사원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였나.

'일을 잘한다. =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다.'


대학 선배의 조언도 사회생활 선배도 없어 무지했던 나는 '일을 잘한다'는 소리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다.'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20대 후반까지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속한 팀에서 1등'

'일을 조용히 열심히 잘한다'는 소리는 달콤했지만, 나는 고집이 있는 아이였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언행, 업무의 비효율성 등이 보이면 3~4번 정도 참다가 윗사람 이어도 한마디 했다.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한 번은 비경력 낙하산으로 나보다 6개월쯤 뒤에 입사한 여자분이 부서 대리로 들어왔다. 대학도 졸업했고, 윗선 소개 입사라 했다. 전공과 다른 포지션으로 들어왔는데 조금 이상했다. 한 번에 해도 되는 일을 여러 번에 나눠 시키고, 나 없이 이뤄지는 회의자리에서 나를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내가 그만둬야 하는 사유로는 '쓰레기가 있는데 줍지 않고 지나갔다.' '인사를 하지 않았다.' 등. 그때 난 겨우 21살 이였고 어릴때부터 인사하난 정말 너~무 잘한다 소리를 밥먹듯이 들었으며 이미 나는 그 대리보다 7개월 먼저 입사해서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던 터인데 말이다. 직원 평균나이가 30대 정도였던 것 같은데 오죽했음 그분들이 어린 나에게 그런 얘길 전달해줬을까 생각하니 다 모르지만 어지간했구나 싶다.


그 대리때문에 잘리진 않았지만 자존심은 확실히 상했고, 그때부터 앞으로 내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허드렛일이 아닌 그나마도 '전문적인 일'이 하고 싶었다.


몇 년 동안 일반 사무업무를 전전하다 전자출판 회사에 입사했다. 알바 작업량에 따른 인센티브 조건으로 말이다. 일단 일을 배우면 사무업무는 안 보겠지 싶었다. 영업팀에서 전자도서관 계약을 받아오면 코딩+디자인팀이 온라인 도서관을 만들고 우리가 컨텐츠인 E-BOOK 제작을 하면 됐다. 이북 제작에 투입하는 아르바이트생은 6~7명 정도. 이북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2가지. 초창기라 프로그램 오류도 많았고 그 오류 메시지마저 영문으로 뜨니 그중에 젤 오래 다니고 잘하는 넘사벽 00에게 모두가 의지했다. 우리 팀은 마감일까지 적게는 몇백 권에서 많게는 1~2천 권 정도의 책을 만들어냈다.


책을 만들라고 하니 또 열심히 책을 만들었다. 우리 중 제일 잘하던 그 친구가 어느 날은 자기한테 묻지 말고 네가 해결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라니 그 후로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 번역을 하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했다. 표지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포토샵을 배우러 다니면서 어떻게든 표지를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잘하는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아이디어가 샘 솟았다. 머지않아 제일 잘하던 그 친구만큼 이북을 만들어냈고 국가지원 사업에 출품하는 이북에 영상과 사운드를 편집해 더 퀄리티 좋게 만들 수 있었으며 어느새 그 친구는 퇴사하고 내가 1인자가 되어 있었다. 30만원 기본급+인센티브 알바로 들어간 내가 몇 달 만에 이북팀 알바생 중 최고 금액인 180만 원을 찍었을 때 대표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00 씨 내가 팀장한테 들었던 거랑 내가 직접 겪어본 것이 너무 다르네. 일도 잘하고 나는 자네랑 오래 일하고 싶어. 우리 고정 월급으로 계약하면 어떻겠나."


그때 나는

'일을 잘한다 = 일을 많이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다른 직원이 이북 제작 프로그램을 하나 열어 책 작업을 하고 있으면 나는 여러개를 열어 다른 사람이 1권 만들 시간에 3~4권의 책을 만들었고, 회식을 하러 나갔다가 토하고 들어와 다시 작업을 하고, 마감이 급한 프로젝트에는 새벽 5~6시까지 일하다 집에서 샤워만 하고 나오기도 했는데, 밥을 못 먹어내서 점심은 500ml 초콜릿 우유+카스테라 정도만 먹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일이 능숙해졌다.

시간이 흘러 나는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에 흥미를 갖고 학원도 다니고 하면서 여성화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 회사에 웹디자이너로 들어갔다. 당연히 월급은 적었다. 아마 100만 원 초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도매에서 일하고 있던 20 젊은 남자 사장이 군대를  제대한 남동생에게 작은 사무실 하나 얻어주고 자기 매장의 신발을 DSLR 게 했다. 내가 할 일은 찍은 사진으로 제품 페이지를 만들어 지마켓 온켓 등 온라인 몰에 상품을 등록하는 일이였다.


지금이야 요령도 있고 이미지 구매 사이트를 활용하면 짧은 시간에 꽤 좋은 퀄리티로 상품페이지를 만들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두 가지 다 안됐으니 그들이 원하는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어떤 날은 그 남동생 부사장(?)이 내 업무를 시간별로 쪼개서 '00 씨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이거 하세요.' 시간이 다 되면 '00 씨 지금부터 언제까지는 이거 하세요.'라며 시간표 놀이를 했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못해냈다는 게 더 싫어서 일단 시키는 대로 일했다.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니 편집하고 사이트 등록하고 촬영을 해보란다. 촬영을 어느 정도 할 줄 알게 되자 이번에는 매장 가서 제품을 가져와야 했고, 주문 건을 포장하는 업무도 했다.


아직도 내 나이 20대, 사회생활이란 건 부딪혀서 알게 된 게 전부였던 나에게

"일을 잘한다"는 이제  "여러 가지 일을 할 줄 안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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