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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라 Jun 17. 2022

'일.을 잘.한다는 것'

사장과 직원 사이

"퇴사하겠습니다."

"난 OO 씨가 필요해. 퇴사는 안돼."


처음에 썼던 이 대화는 내가 20년 동안 회사를 퇴사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할 줄 아는 게 점점 늘어난다.


온라인 쇼핑몰에 웹디자이너라는 역할로 일하게 되면서 이력서 경력사항에 '저는 웹디자인 말고도 이거, 저거, 요것도 할 줄 압니다.'라고 써서 이직을 했다. 이직한 회사는 젊은 여사장이 친구 한 명과 일하던 온라인 쇼핑몰 업체였는데 사장이 소위 좀 놀던 언니였다.


정시에 내가 출근해서 문을 연다. 환기를 시키고 아침부터 쇼핑몰마다 전날부터 아침까지 들어온 주문을 수집한다. 음악을 좀 키운다. 주문정리 후 믹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촬영한 제품 사진을 셀렉하고 있으면 10시반 11시쯤 사장이 친구와 함께 출근한다. 점심시간 따위 따로 없다. 본인이 출근하면 골똘히 메뉴를 고르고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그전에 배웠던 이것저것   아는  스킬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이미 해봤던 일이니 속도가 빨랐다.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것 같았다. 어느새 촬영, 편집, 사이트 등록, 주문 사입, 포장까지 여사장이 신경 쓰지 않아도 일에 지장이 없었고 나는 고객 cs 전화까지 받고 있었다.


일 하는 시간(=경력)을 쌓아갈수록 일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많아질 수록 할 줄 아는 게 점점 늘어났다. 중소업체에 다니다 보니 어린 나이에도 금방 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


"나이,학벌 보다 사장인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 승진"


대표가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해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내가 모르고, 못하는 건 자비를 들여 외부(학원, 개인과외)에서 배워왔다. 카메라, 조명, 앱, HTML, 자사몰 만드는 법, 영상편집 등등.


어느 날 평소랑 같이 신상품 상품 페이지를 작업하고 있는데 양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은 단축키, 오른손은 마우스를 눌러야 하는데 굽혀지지가 않았다. 물론 훨씬 이전부터 목, 어깨, 손목, 손가락까지 너무 아파 동료에게 빨래 짜듯 팔을 비틀어 달라고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마다 주위에서 병원을 가라고 했지만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팀장으로 이 일을 최대한 빨리 해내야했다.


그런데 두 손을 움켜쥘수가 없었다. 충격이었다. 일단 회사에 피해를 줄 순 없으니 그만둔다고 했다. 그때 회사 본부장이 웹작업은 하지말고 디자인팀 관리하면서 스타일 리스트로 포지션을 바꿔 일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회사가 싫어서 그만둔다는 게 아니였기에 오케이했다. 할말은 해야하는 성격이지만 기본은 잔잔한 성격이라 기가 쎈(?)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산다는 거 자체가 도전이였지만 새로운 일은 항상 해냈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내 이력서에 새로운 스킬을 한줄 추가했다.


중소업체 사장 입장에서 혼자서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마다 할 리가 없었다. 매출이 늘어나는 것엔 한계가 있고 내 수익을 이전 보다 포기할 수는 없고, 함부로 자를 수도 없는 정직원을 두 명반 정도 써야하는 입장인데 한명을 쓰면되니 이렇게 땡큐일 수 없다. 거기다 알아서 열심히 해주는 직원, 다른 직원도 관리해 주는 직원. 과장이든 팀장이든 실장이든 직급따위 머라고 붙이든 크게 상관이 없다. 몇가지만 적당히 맞춰주면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혼자 안달 나 일하는 젊은 직원이라니. 나라도 안쓸 이유가 없겠다.


어느 날 일을 하고 있는데 당시 회사 대표의 누님(당시 50대)이신 고모님이(직원들 편의로 고모님이라 불렀다.) 주에 2~3번씩 알바로 주문 포장을 하러 나오셨는데 항상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00 팀장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주지 마~~." 포장하는 공간 한켠에 행거3개에 빼곡히 옷을 걸어놓고 안경을 코에 걸고 땀흘리며 혼자 스팀질하다 조명 두개 세워 놓고 무거운 DSLR로 몇 시간씩 촬영을 하고 있노라면 항상 나를 불러 저렇게 얘기 하셨다.





'일을 잘한다 = 일을 열심히한다.'
혹시 대표님 가족이세요?


내가 열심히 땀을 삐질거리며 일하는 걸 보면 대표+와이프가 나를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일을 하면 할수록 매출이 늘고 본인들이 쓸 돈(수익)이 늘어남과 동시에 말하면 몇십분도 안되서 피드백을 주고 직원 관리도 알아서 처리하고 나쁜 머리 한번 쓰질 않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은 중소업체에선 대표가 직접 직원들 하나하나 케어하는 상황이 종종 생기기 마련이라 그냥 신경 쓸 일이 줄어든다는 하나만으로도 좋아했다.


반면에 직원들 입장은 다르다. 자기들이 몇번이나 얘기할 땐 사장이 안된다고 했는데, 내가 말하면 들어준다. 내가 열심히 일하니 대표가 자기들과 비교를 한다. 옆에 사무실 사장이 와서 커피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는데 내 칭찬을 하는 것 같다. 듣기가 싫다.


이런 건 내가 사교성이 있어 직원들과 장난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한 번씩 풀어갔음 또 좋았을 텐데 그땐 내가 장난농담은 전혀 못했고 술도 아예 못 마셨었다. 전참시(전지적 참견 시점)에 배우 배종옥님을 보면 어렸을 적 나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자고로 직원이란 사장 욕도 하고 일도 좀 쉬엄쉬엄 적당히 해야하거늘 어느날 젊은 애가 들어와 퇴근도 안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 일만 하고 있네? 근데 또 매출이 올라. 온라인 쇼핑몰에서 매출이 오른다는 건 판매건수가 올라간단 뜻이고 배송, CS 직원들이 덩달아 엄청 바빠진다는 소리다. 전엔 좀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본인들이 받는 월급은 늘 똑같은데 전보다 훨씬 쉴 틈이 없다.


어느 날 누가 나보고 "대표님 가족이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표 가족, 그렇다고 그냥 직원도 아닌

'일 잘한다는 소리가 좋은' 워커홀릭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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