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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라 Jun 20. 2022

"회사생활이 잘 맞으시나 봐요"

- '드로잉 쌤'이 쏘아 올린 작은 공



39살, 애플 펜슬을 샀다



아직 완전히 중년으로 넘어가기 전 39살.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이 있는. 워킹맘.이 그림이 그리고 싶어 아이패드 펜슬을 구입했다. 글도 쓰고 싶어 매직 키보드도 사들였다. 경제적 상황? 그런 것은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이모티콘 작가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번다는데 그림에 관심이 있으니 그려보고 싶었다. 엣시에 내가 그린 그림을 팔면 된다는데 그려보고 싶었다. 마침  같이 일하던 여직원이 아이패드를 살까 말까 고민했다. 

"고민하지 말고 사! 같이 그림 그리자." 

그렇게 일주일에 두어 번 퇴근하고 40분 정도 그 직원과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너무 재밌었다. 퇴근시간도 눈치 보는 회사라 둘이 따로 나가서 카페에서 만났다. 뭐, 그림 실력은 엉망이었다.(내 그림 실력만. 알고 보니 그 여직원은 패션디자인과 출신...ㅠㅠ) 


'자 보자. 그림을 언제 그려봤더라? 고등학교였던가...?'


20여년째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도 없고 일하느라 키보드와 마우스만 쥐었던 손에 그림은커녕 펜으로 글씨를 써도 그렇게 악필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좋았다. 카페에 있는 다른 사람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각자 그림을 그리다가 또 도란도란 얘기도 하다가 다시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그저 좋았다. 


그 회사를 퇴사하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1년이 흘렀다. 내 펜슬은 무늬만 펜슬로 키보드에 달려 잊혀졌다. 어느 날 MKYU(미경 대학) 톡으로 이모티콘 작가 되기 설명회 알림이 떴다. 내 마음속 드로잉 방에 꺼졌던 불이 '탁!' 켜졌다. 대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였는데 귀여운 이모티콘 작가셨고 나이가 들어도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 대학생 아들도 그림을 하나도 그릴 줄 모르는데 그냥 끄적인 그림으로 이모티콘 등록을 해서 대학 등록금을 냈다는 일화를 들으며 나도 그 길을 가고 싶었다.


혼자서 쓱쓱 그려서 카카오 이모티콘에 제안을 넣었다. 두 번 다 실패였다. 여기서 그만두긴 아까우니 일단 드로잉 스킬을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회사 근처 1:1 드로잉 선생님을 찾았다. 나이 마흔에 워킹맘이 말이다. 




드로잉 쌤이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때까진 몰랐다. 정말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퇴근을 하고 3~4 정거장 거리의 드로잉 쌤 작업실에 갔다. 하얀색 고양이 2마리와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반겨주는 원룸형 작업실이었다. 고양이들이 낯도 안 가리고 나에게 와서 쓰다듬어달라고 했다. 분위기가 좋았다. 드로잉 쌤은 아이는 없는 기혼자면서 나와 몇 살 차이 안나는 여자분이셨다. 역시 경력자한테 배우니 배우는 것만으로 좋았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릴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다 못 그린 그림을 마저 그리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기도 했다. 집과 회사 거리가 1시간 30분 거리였는데 피곤하지만 기분 좋은 그런 느낌?


두 번째? 3번째였나? 평소랑 똑같이 아이패드를 열어 그림 그림 그릴 준비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한테 얘기했다. 


"벌써 일한 지 19년 정도 돼가네요. 이젠 정말 지치는 것 같아요. 이직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랑 거리가 멀어질듯해요."

"네, 그런데 00님은 회사생활이 잘 맞으시나 봐요. 전 안 맞아서 4년 정도 일하다 그만두고 프리랜서 하는 거예요."



00님은 회사생활이 잘 맞으시나 봐요.

00님은 회사생활이 잘 맞으시나........

00님은 회사생활이 잘 맞으..............

00님은 회사생활이 잘.....................

00님은 회사생활............................

00님은 회사..................................



'응? 뭐라고요? 네?'

갑자기 이명이 들리는 같았다. 멍했다. 웃겼다가 멍했다. 그날부터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회사에 속해서 일하는 게 내 성향에 맞는지 안 맞는지 이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안 맞았다. 맞았으면 한 회사에 오래 장기  근속하고 있겠지. 근데 왜 이직하면서 회사를 전전했을까?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주위 어르신들이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 한다고 얘기했고, 적은 월급 이어도 꾸준히 받아오는 게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린 자의 미덕인 것처럼 얘기했다. 같이 회사 생활하던 기혼자들이 그렇게 버티는 것처럼 나도 버텨야 하는 건 줄 알았다. 다른 생각을 해 볼 틈이 없었다. 


그때까진 몰랐다. 정말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 내가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던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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