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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라 Jul 07. 2022

어느 출근길,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다리인데, 내 것이 아닌 듯.

어느 날 출근길에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하철 계단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지지 않았다. 눈도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이었다. 정신도 멍했다.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30대 초중반이었나.... 출산 후 3~4개월 만에 재취업을 했다. 1년여를 쉬다 들어간 회사라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출산 후 3~4개월 만에 취직이었는데 들어갈 때 59kg로 였던 몸무게가 48kg까지 빠졌다. 대표가 원하는 온라인 상세, 자사몰 등의 비주얼, 직원의 오랜 근속, 전년보다 더 나은 매출 등 대표가 원하는 건 거의 이루고 있었다. 


팀원들이 어리고 적은 연봉으로 뽑은 비경력 직원의 업무들을 봐주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팀원끼리 사이가 좋았다. 가끔 우리가 회의실에서 일 얘기를 하다가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나면 50대 정도 되시던 오프라인(매장, 백화점) 담당 본부장님이 슥~~ 다가와 '무슨 좋은 일 있어?' '뭔데?' 하면서 물어보시거나 가끔 뭔가 우리를 지긋이 보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말투도 부드러우시고 영업하셨던 분이라 융통성도 있으셨는데 매번 말만 하고 밥이나 차 한번 같이 마셔본 적이 없어 엄청 짠돌이신가 보다 하고 말았다.


엉망이던 온라인팀을 어느 정도 위치로 끌어올렸을 때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는 제품의 퀄리티나 기존 판매 데이터를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제품을 저수량, 고비용으로 제작했고 그것을 팔아야 하는 오프라인 지점장들이나 온라인에서 낸 의견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회사의 복지가 없다며 이직, 연봉만 의논했고 나에게도 돌아오는 건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뿐이었다.


며칠 뒤 오프라인 본부장님께 우연히 출근길 얘길 했다. '본부장님, 저 갑자기 아침에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잠자코 듣고 있던 본부장님이 생각과 다르게 본인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면서 그 또한 지나간다며 나보고 버티라고 했다. '그래 좀 더 있어보자.' 다시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노출도 잡고 당일 제주도 촬영도 마다하지 않고 제품 판매에 도움이 되는 일은 모두 다 했다. 어느 날은 서울에서 파주 창고가서 물류 포장도 도왔다. 


사무실이 근처 옆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 없이 직원들이 날랐다. 사무실에 이미 중간 가벽이 쳐져 있었고 출입문 쪽으로 안쪽 문이 뚫려 있었는데 대표가 본인 개인 사무실 앞쪽으로 출입문 위치를 변경했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빙 돌아 나가야 하는 꼴이었다. 그 문 근처에 출퇴근 종이 표를 설치했다. 종이를 넣으면 찍! 하고 출근 시간이 찍히는 기계였다.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그냥 지각하지 말고 일찍 퇴근하지 말고 화장실 및 기타 용무로 밖에 자주 나가지 말라는 의미였다. 퇴사를 결정할 무렵 나는 입사 때보다 10kg를 감량했고 역류성 식도염을 얻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함만 남아 있었다. 


그 뒤로는 역할을 줄이거나 다른 파트로 계속 이직했다. 40대가 되고 나니 가끔 나에게서 예전 그 본부장님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젊고 어린 친구들이 하하 호호하는 모습이 이뻐 보였고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근속연수가 늘고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는 게 더 편했다. 예전에 우리를 보며 웃음 짓던 그 본부장님이 왜 우리와 차 한잔, 밥 한 끼 안 드셨나 의아해하던 게 이제 이해가 됐다. 직원들과 아무리 미래지향적인 이야길 한다고 해도 결국은 답 없는 회사 이야기, 누가 어떻더라 체계가 이래서 되겠냐는 부정적인 이야기. 그런 이야길 20년 동안 매번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나도 모르게 젊은 친구들보다는 나이가 좀 있거나 회사 경력이 좀 있는 30대 중 후반 이상의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게 편해졌다. 


3~4년 전부터는 회사에서 답답한 일이 생길 때면 밖으로 잠깐 나갔다. 주위에 숲이 있다면 그 곳을 거닐었고 없으면 동네라도 골목골목 누볐다. 점심도 한 번씩 따로 먹는다고 빠졌다. 가까운 커피숍에서 가볍게 차 한잔 사서 거니는 게 좋았다. 그것도 없으면 근처 책방을 찾아 책을 보거나 카페에서 패드로 검색을 하고 강의, 전자책을 보거나 못 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았다. 숨이 쉬어졌다. 조금 나아진 줄 알았다. 나도 이제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침 출근길에는 어김없이 한숨이 나왔다. 걷다가 회사 건물이 보이거나 지하철 계단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어김없이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아......................' 이직으로 출근길이 달라져도 한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정말 막다른 곳, 벼랑 끝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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