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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23. 2015

옷가지로 가득한 종이가방이
위태로워 보인다.

옷가지로 가득한 종이가방이 위태로워 보인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부푼 가방을 끌어안고 여자는 하염없이 창밖만 본다. 정신 좀 차려라. 언제까지 그럴 건데. 네가 지금 몇 살인데 그러고 있어. 놀랐다.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었지만 남자에게 그런 얘길 듣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생각 좀 하며 살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잠깐만. 네가 그런 얘길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기억 안 나? 삼 년 전이었어. 그때 네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 지금의 나와 똑같았어.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고.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네가 그랬잖아.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간 지 한참이 지나서야 여자는 겨우 생각을 이어갔다. 그때까지 여자의 머릿속엔 남자가 했던 말만 남아있었다. 왜. 반 년 만에 만난 남자는 전엔 결코 입지 않겠다던 정장 차림이었다. 낯설었다. 여자가 느끼기엔 남자도 자신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남자는 마치 스스로의 연기가 어색한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연스러워 보이려 애쓰는 배우 같았다. 애처롭게까지 느껴지던 첫인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남자는 여자의 근황을 묻더니 이내 정신 차리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일어섰다. 바뀐 전화번호도 묻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사라졌던 거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어느덧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졌다. 계절이 바뀌어도 버스 창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다. 냉방기만 온풍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문득 여자는 삼 년 전에 그랬듯 삼 년 뒤 자신은 오늘 본 남자를 닮진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 그때 넌 어떤 모습일 거니. 세상엔 신기한 일이 너무나 많다.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김없이 낯선 부분이 드러난다. 날카롭게 날이 선 생경함이 몸을 할퀴고 지나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상처는 늘어나고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픔에 둔해진다. 갑작스레 멈춘 버스에 가방이 찢어지며 옷가지가 바닥에 쏟아졌다. 놀란 여자는 바삐 옷을 주워 모았지만 찢어진 가방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종이 쪼가리로 변한 가방과 옷 더미를 끌어안은 여자는 버스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진_kiyon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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