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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25. 2015

화분이 남아있었다.

모두 치웠다 생각했는데 저것도 네가 준 거였다.

화분이 남아있었다. 모두 치웠다 생각했는데 저것도 네가 준 거였다. 꽃만 안 피면 되는 거지. 이거 꽃 안 펴. 이게 다 자란 거야. 삭막하잖아, 컴퓨터하고 사무용품밖에 없는 책상이라니. 크지도 않으니까 책상 위에 놔. 이것도 살아있는 거야,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 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서일까. 모든 게 버려진 뒤에도 화분은 남았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누가 누굴 버렸는지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이별은 서로에게 버려지는 일이다. 물 안 줬지. 하여튼 이러면 안 된다고. 너 물 안 마시고 살 수 있어? 얘도 물을 줘야 살지. 말려 죽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다 너. 누가 더 잔인했던 걸까. 조금씩 마르다 비틀어져 바스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물통을 쥐고 있으면서 한 방울도 떨어뜨려 주지 않았다. 손에 물통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뒤늦게 떨어진 물방울은 메마른 잎사귀를 바스러뜨렸다. 간신히 견디고 있었지만 이미 물방울의 무게조차 버틸 수 없을 만큼 나약해진 뒤였다. 멍하니 죽은 잎을 바라보며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뿌리 끝까지 마른 풀은 신이 아닌 이상 살릴 수 없었다. 너와 난 신이 아니었다. 식물 하나를 말려 죽인 허술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을 뿐. 풀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작은 화분에 갇혀 살던 식물은 죽어서조차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몇십 년은 지나야 썩어 없어질 비닐봉지 안에서 온갖 폐기물에 뒤섞여 악취를 견디며 고통스러워할 거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버려졌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버려진 건 사람이었다.

화분이 남아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어디선가 낯선 향이 나 고개를 돌려보니 화분이 있었다. 꽃 하나 피지 않은 풀에서 향기가 났다. 이 풀에서 향기가 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2011.04.24.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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